위타드 오브 첼시는 소싯적부터 나의 최애 브렌드인데 오랜 기다림 끝에 2년전인가 한국에 매장이 생겼다.

마.침.내.

다니던 미용실 근처에 강남점이 생겼길래 머리하고 집에 오는길에 휘휘 둘러봤던 기억이 나는데 생각보다 들어온 품목이 많지 않아서 실망이었다. 핫초코라던지 커피, 과자류도 골고루 들여오느라 그랬던거 같은데 아니라고 차를 내놔. 최근 청담 매장을 가봤는데 그때보단 좀 더 들어오긴 했더라. 같은 차 여러 디자인 틴.

아무튼 이렇게 불평불만이 많지만 이미 내 손엔 이것저것 들려있었고 그때 집어온 피카딜리 블랜드를 다시백으로 두어번 먹고 어디 처박아뒀다가 상미기간이 딱 끝나길 기다려서 이제서야 제대로 각잡고 먹어보는 중이다. 그동안 너무 대충 아무거나 먹고 치우는 생활을 했던것 같다. 심히 반성하면서 현관에 척화비라도 세워야 하나 잠시 고민.

위타드의 No. 93, Piccadilly Blend입니다. 홈페이지 참고하면 P.G. Wodehouse경의 작품들에서 피카딜리를 무대로 하는 장면들이 많았고 그의 93세 일기를 기념하여 93번 번호를 붙여주었다고 하네요.

The adventures of Bertie Wooster and his long-suffering butler Jeeves are often set in and around Piccadilly. The writer PG Wodehouse reached the grand old age of 93 before he died, so we’ve given this tea the number 93 in his honour..

NUMEROLOGY, Whittard of Chelsea website

정식 통관이라 한글로 막 이것저것 스티커 붙어있는데 의외로 상세하게 잘 나와있어서 좀 놀람. 들어간건 홍차, 히비스커스, 합성향료(딸기향, 장미향, 연꽃향), 수레국화꽃잎 이라고 하고 특이한게 독일의 Halssen & Lyon GmbH 에서 만들었다고 붙어있네요? 외주줬습니까? 어쨌든 피카딜리에 대한 무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히비스커스, 딸기, 장미, 연꽃, 콘플라워 야 이건 못참지. 그리고 좀 서민 친화적이었던 그 옛날 남대문에서 자주보던 틴케이스 디자인이 아주 모던하고 클래식하게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디자인으로 바뀌었는데 한편으론 섭섭한데 보고있으면 좀 디자인 잘 뽑힌듯.

개봉했을때의 향은 평범한 로즈힙 가향차 느낌인데 첫 개봉때 느낌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로 보아 임팩트는 없었던거 같다. 솔직히 기분탓인지 좀 묵은내가 나는것도 같고. 콘플라워, 히비스커스가 꽤 많이 들어있는 구성이다. 딸기, 장미, 연꽃향은 그냥 가향만 했을거 같은데 건엽에서 나는 향은 어딘가 깔끔하진 않은 느낌이다. 내 사랑 위타드가 원래 그럴리는 없다고 믿고 아, 이것은 상미기한을 넘긴 군내다. 라고 생각하기로. 차는 바로바로 소비하도록 합시다.

한스푼, 300ml, 2.5분, 100도 직전 물. 수색은 평범한 홍차색이고 가향된 장미가 콘플라워와 함께 아주 무난한 느낌이다. 어찌보면 밍숭밍숭. 그리고 수렴성이 적어서 부드럽게 술술 넘어간다. 피카딜리는 그런곳인가. 제가 책을 안읽어봐서 그런데요, 우드하우스 선생님, 피카딜리의 풍경이 이게 맞는겁니까? 위타드가 그렇다는데 그런가보다 해야지. 근데 어딘가 심심하다. 그래서 이번엔 6g을 계량해서 다시 마셔봤다. 나머지 조건은 그대로. 앗 이럴수가. 집나간 히비스커스가 돌아왔어요. 수색도 좀 붉어졌다. 이거구나. 새콤한 히비스커스가 입을 열어주고 로즈, 딸기 가향이 달달하게 입에서 머물다가 베이스인 홍차를 충분히 느끼게 해주면서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간다. 와 스콘을 부르는 맛. 핵심은 히비스커스가 충분히 같이 들어가줘야 하는데 3g은 아무래도 양이 적다보니 히비스커스가 거의 안들어가게 떠지기도 하고 들쑥날쑥 한거였다. 나중엔 신경써서 숟가락질 했더니 3g에서도 비슷하게 나긴 나더라. 그래도 좀 진하게 마시는 쪽이 나은편인게 차 자체가 워낙 순해서 가향을 충분히 즐기려면 6g 가까이 넣어주는게 좋았다. 참고로 위타드에서 제시한건 자기네 머그컵에서 2g, 200ml, 95도, 3-5분이었다. 내 결론은 5~6g, 300ml, 99도, 2.5분.

물빠진 콘플라워는 언제나 좀 슬픈 느낌이 있다. 건엽에서 느껴지는 화사함과 엽저에서의 저 처절함 사이에는 묵묵히 가향을 지탱해주는 힘이 있는 것이다. 자칫 자극적일 수 있는 히비스커스와 장미와 희미하게 존재를 감춘 딸기 사이에서 깔끔하고 부드럽게 마무리되는 차 한잔을 마시고 나니 나 조금은 사색적인 사람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