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부흐빈더 공연을 못가게 되면서 올해 베토벤 소나타 전곡은 꼭 참석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올해도 역시 시간과 돈이 그리 넉넉치 않아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토요일 밤 문득 다음날 아내도 집에 있을거고 혼자 외출하는 김에 보고올까 싶은 맘이 들었다. 그래서 양도표를 덥썩 집어삼키고 마지막 30, 31, 32 후기 소나타를 오게 되었다.

베토벤 후기 소나타는 해석의 깊이도 그렇지만 일단 연주 자체가 너무 어려워 한참 후세가 되어서야 겨우 연주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베토벤 후기 소나타를 연주한다는건 실력에 있어서 그만큼 완성도가 있으면서 베토벤의 음악적 정수를 깨우친 뒤 철학적 사색과 통찰을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연주자들의 해탈의 경지를 보여주는 예술적 퍼포먼스에 가까워서, 그렇다면 최근 그 정도의 연주자가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해외로는 폴리니나 부흐빈더, 국내에는 백건우, 정명훈 정도 떠오르는 정말 듣기 어려운 레파투아다. 그러고보니 작년에 거동조차 힘들어 보이는 폴리니 할아버지가 힘겹게 무대를 가로질러 피아노에 앉으신 뒤 갑자기 어디선가 초인적인 힘을 받아 내 기억엔 30번을 연주하고 들어가시는 영상에서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역시 후기 소나타는 연륜과 경험같은 연주자의 사골같은 음악성이 필수적이구나 느끼기도 했다.

아무튼 지금 현재 지구촌 최고의 베토벤 전문가라는 부흐빈더 선생님의 연주를 실황으로 너무너무 듣고싶었는데 소원성취했다. 고령의 연주자들은 사인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사인을 받아둬야겠다는 맘이 있기 때문에 씨디도 급하게 하나 구입했는데 이왕 사는거 제대로된 전집을 사고 싶었으나 진즉 품절이고 베스트앨범만 남았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가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고 부쌤이 무대로 나오셨다. 엊그제 장한나가 유퀴즈에 나와서 걸어나오는 것만 봐도 음악 좋을지 어떨지 안다고 했는데 진짜 걷는것 조차도 아무생각 없음의 초월적 분위기었다.

30번. 강물이 흐르듯 때론 거칠고 때론 반짝이는 거침없는 연주였다. 폭풍같은 1, 2 악장에 이어 3악장에선 이전 악장의 여운으로 어디선가 개울물이 흐르는 환청이 들릴 정도였다. 패달에서 프레이즈마다 살짝씩 끊는거 외엔 거의 발을 떼지 않으시고 우나코다도 엄청 사용하시면서 아스라이 퍼져나가는 물안개 같은걸 계속 보여주시다가 강물위를 뛰어다니는 요정들을 보여주시고 다시 거대한 강으로 힘차게 흘러가면서 빠른 페세지를 증폭된 울림으로 치달아간 뒤 이윽고 바다에 이르러 레가토레가토 하면서 긴 호흡으로 마무리하셨다. 솔직히 30번에서 울줄은 몰랐는데 마지막에 너무 울컥해서 박수 제대로 못침.

31번. 1 악장에서 아름다운 실버라이닝에 살짝 정신 나갔다가 2 악장 스케르쪼에서 신에게 대항하는 모습까지 너무도 명확한 그림을 그려주시고는 3악장에서 바흐적 모먼트로 갔다가 노래했다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마무리까지 그야말로 후루룩찹찹찹 연주하셨다. 마지막에 화음으로 다시 푸가조로 넘어가는 부분에선 종이 울리는듯했고 베토벤도 부쌤도 남은 열정이 아직 활활 타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안에서 타닥거리는 작은 불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그 뒤에 커다랗게 활활 타오르는 불이 일렁이는 느낌. 박수치면서 일어나야 하나 잠시 고민.

32번. 아니 선생님 진짜로 인터미션 없이 달리시는건가요. 이건 듣는 제가 준비가 안될것 같은데요. 하지만 짜릿한 1 악장이 우다다닥 쏟아져 나왔고 정말이지 선생님 퇴근 빨리 하고 싶으세요? 싶게 중간중간 또 후루룩후루룩 가고나서 정신차릴 틈도 없이 2악장이 되었다. 중간에 좀 느린 부분에서 오른손만 연주하는 부분이었는데 왼손으로 패달을 밟은 오른쪽 다리 허벅지 뒤를 주무르시는거 보고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지금 생각해보니 31번 할때였나 싶은데 아무튼 그저 쌤이 연주를 무사히 마치셨음 좋겠다는 마음으로 듣다보니 2악장이 거의 끝나버렸지 뭐에요? 어 이런다고? 너무 감흥이 없는데? 나는 당연히 32번 2악장에서 펑펑 울며 앵콜은 눈이 부어서 못볼줄 알았는데 그냥 이렇게 끝난다고? 하면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트릴나오면서부터 부쌤은 나의 모든 호흡을 가져가셨고 진짜 영원같은 트릴이 지나고 마지막 화음을 찍으실때까지 숨을 내쉴수가 없었고 그 레조넌스가 다 사라진 뒤에야 탄식처럼 숨을 내쉬면서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그래서 기립을 못함.

앵콜. 마이크를 들고 나오셔서 직접 인사를 하셨는데 “콘서트 7개 하면서 너네 가족처럼 같이 해줬어. 나 정말 너네 원더풀하다고 얘기하고 싶어. 그리고 좀 짱인게 진짜 많은 젊은 사람들이 콘서트 와주고 영스터들이 악기 들고오고 진짜 완전 판타스틱이야. 다들 보고싶을거고 내년에 다시 만나. 오늘밤의 앵콜은 즉흥곡 프란츠 슈베르트 할거야. 캄.사.합.니.다.” 라고 특히 마지막 감사합니다는 한국어로 인사하셨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즉흥곡 4번을 연주하셨는데 그 도입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아주 덤덤하게 태어나서 그렇게 무덤덤한 도입부는 처음들어보겠네 싶게 연주하시는데 몹시도 관조적인 연주를 이어나가셨고 진짜 이 곡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정도로 좋은 연주였다. 정말 인생을 달관한 슈베르트가 시공간을 넘어 직접 연주해주는 느낌이었다.

앵콜포함 80분정도 되는 공연이어서 너무 아쉬웠는데 또 연주 자체는 잊을 수 없는 연주들이라 복잡한 기분이었다. 사인은 듣던대로 회전률이 엄청나서 빠르게 줄이 줄어들었고 이틀전 지인이 “암 크라이” 했더니 “워즈 잇 쏘 배드?” 하시는걸 얼결에 “예스” 했다가 모두가 크게 당황한 사건이 있었다고 나중에서야 “노노노노 임프레시브 베리 임프레시브” 하면서 다같이 하하호호 웃는 사진을 보내주셨기에 그거 보여드리면서 “얘 기억나세요? 제 친구에요” 했는데 밀려오는 사인해주느라고 “어어 어어어어어” 하고 마셨다. 그래도 깨알같이 사진도 찍었음. 듣자하니 당일에 바로 출국하신다고. 하루쯤 쉬고 가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고 그냥 일단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내년엔 베피협 전곡을 한다고 하시는데 할아버지 제가 열심히 돈 모아놓을게요 건강하게만 다시 오세요.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