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6581. 고카세 카마이리 신차 특상 2023

조금 특별한 일본 녹차를 마시기에 앞서 간략하게 배경지식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설명을 먼저 해본다. 너무 길고 지루해 보인다면 차를 한잔 마시면서 읽어보자. 일본에서 녹차라고 하면 주로 센차(한자로는 전차)를 이야기해서 보통은 특별한 지칭 없이 일본녹차, 녹차라고만 되어있어도 센차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센차는 차나무에서 찻잎을 줄기째 기계로 벌초하듯 윗둥 부분만 배어서 만든다. 차나무의 윗둥은 이제 막 올라오는 줄기와 어린잎들로 당연히 줄기라고 해도 단단한 나뭇가지를 생각하면 좀 오해의 소지가 있고 포도가 달린 줄기보다도 더 가늘고 여리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것을 잎을 딴다고 해서 채엽과정이라고 부른다. 이후에 이 전체를 증기로 쪄내는 방식의 살청(청을 죽인다는 그거)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찻잎 속의 여러 활성 성분을 멈추는 작업이다. 증기로 쪄내는 살청이어서 증청이라고 부르고 증청 방식으로 차를 만든다 하여 증제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센차의 가장 큰 특징은 증제차라는 점이다. 요즘 유행하는 맛차(한자로 말차인데 이건 왠지 말차표기가 더 많이 쓰인다) 역시 증제식 녹차(센차가 아닌 덴차를 쓴다)를 말려서 가루를 낸 것이다. 이렇게 일본의 제다법(차 만드는 방법)은 독특한 증제식 방법을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한국, 중국의 제다법은 증청보다는 고온의 가마에 찻잎을 던져 넣고 뒤적뒤적 볶듯이 가열해서 빠르게 효소들을 비활성화하는 덖음 방식을 사용한다. 이후 본격적인 건조 방법에 따라 초청이네 홍청이네 쇄청이네 하는 말들을 붙이는데 이렇게 이름이 다양하게 더 많은 것을 봐도 증청에 비해 더 일반적인 방법이 덖음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우전이니 세작이니 하는 한국의 녹차는 대부분 이러한 덖음 녹차이다. 따라서 일본녹차 한국녹차의 맛의 차이 등을 이야기할 때 가장 확연한 차이는 바로 증제와 덖음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서론이 길었는데 번역기 켜고 루피시아 온라인 스토어를 돌아다니면 가마볶음 녹차라는 카테고리가 나오는데 일본에선 흔하지 않은 덖음 녹차를 모아둔 카테고리이다. 그동안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가다가 수량 및 기한 한정 2023 햇차가 나왔길래 이건 한번 마셔봐야 해 하며 보부상님께 구매를 부탁드렸다. 50g 봉입에 자그마치 2000엔. 상미기한은 1년이다.

근래 구입한 차중에 최고가. 두둥!

일단 특별상품다운 포스가 아주 훌륭하다. 아니 지금 라벨에 금테 둘러준 거야? 디자인부터 아주 스페셜. 고카세는 지명이고 가마이리가 덖음(가마볶음)이란 뜻으로 고카세지역 덖음차 특상품 2023년 햇차 정도 되는 이름이다. 다시 설명하겠지만 대략 2023 하동 덖음 녹차 햇차 특등급 이런 네이밍.

메쇼 가 타도리츠이따 니혼차 노 아타라시 교-지. 스가스가시 부-케노 요우나 가오리 또 야사시 아마미 가 히로가루 이핑 데스.

명장이 찾아낸 일본 차의 새로운 경지. 상쾌한 부케 같은 향기와 다정한 단맛이 펼쳐지는 게 일품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명장은 홈페이지의 상세설명에 더 자세히 등장하는데 바로 ‘고로기‘ 센세가 그 주인공. 농림수산대신의 상을 받으셨나 인증을 받으신 명인이라고 하니 한국 하동의 김동곤 명인 (쌍계명차 티백에 그려져 있는 그분 맞음) 느낌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본에 거의 남지 않은 덖음차의 명인이라고 한다. 타이틀 아래에 일본 미야자기현이라고 작게 써있는데 고카세 지역의 행정주소가 미야자기현이고 고카세의 위치가 실제로는 구마모토현과의 경계라고 한다. 절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노래가 나오는 지리마저 닮아버림.

김동곤명인은 그 옛날 쌍계명차를 세우셨고 고로기명인은 2017년부터 루피시아와 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름을 붙이자면 일본 덖음차 살리기 프로젝트. 앞서 말한 일본 증제차들의 경우 자동화가 아주 많이 이루어져서 비교적 손이 많이 가는 덖음차가 나름 오소독스한 방법으로 포지셔닝이 된듯하다. 허긴 임진왜란 직후부터 쇄국정책을 펴기 시작하며 덖음차는 거의 사라지고 특유의 증제차 공정이 자리 잡았다고 하니 그럼 그게 벌써 400년이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덖음차가 일본차의 스탠다드였던 적도 없었을 테니 거의 없는 전통 되살리기에 가까운 프로젝트. 아무튼 응원합니다.

상세설명 페이지를 읽다 보니 프로젝트의 성공 비결로 증제냐 덖음이냐 이전에 바로 전단계인 위조과정(잎을 자연건조로 시들시들하게 만드는 과정)을 강조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일반적인 일본녹차의 제조공정에서 위조과정이 아주 간단하거나 생략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센차와는 다르다고! 이런 느낌이랄까. 아무튼 응원합니다.

첫인상은 발효없는 우롱차 같았다.

개봉하자마자 녹차 단물의 향과 함께 아주 고소한 볶은내가 난다. 건엽을 마주하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는데 내 안의 한국인이 우전 내지는 세작의 작고 자잘한 건엽을 기대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고 보면 어디에도 봄차라던지 첫물차 어린잎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얼핏 봐도 잎이 꽤 큼직하고 마치 우롱차 같은 인상을 준다. 앞서 본 제품설명에서도 꽃향기, 맑고 시원하면서 감칠맛이 도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우롱차를 크게 참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엽에서부터 이렇게 노골적으로 달고 구수하다니. 그 향이 썩 마음에 들어서 우리지 말고 코 박고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렇게 진한색이 40초. 세차 할때도 색이 꽤 나와서 당황했었는데.

75도 같은 80도의 물을 준비하고 차 5g을 아주 짧게 세차하였다. 150ml 물에 45초. 잔이 아주 작은 15cc쯤 되려나 하는 사이즈인데도 수색이 꽤나 짙다. 보통 세작을 1분 넘게 우린 색이 나와서 아차 싶었다. 심지어 향도 아주 진해서 뭔가 잘못되었구나 싶었더랬다. 그런데 말입니다. 응? 연해. 많이 연해. 한국 녹차였으면 차의 맛과 향이 아주 진하게 우러났을 수색과 향인데 입에서 느껴지는 맛과 향은 너무도 연하고 순하다. 간의 세기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맛의 종류도 좀 다르다. 고대의 연금술을 이용해 센차를 갈아서 우롱차로 다시 조합하면 이런 맛일까? 홈페이지의 설명처럼 꽃향이 압도적이고 믿을 수 없는 시원함과 단맛은 아니었다. 다만 가벼운 무게감속에 은은한 서스테인이 마치 자스민향 같은 꽃향의 울림을 만들어주는데 어른들이 뜨끈한 맑은탕 국물 들이키고 시원하다고 얘기할 때의 그 속 시원한 시원함이 있다. 딱 한 번은 정말 무슨 가향차 마신 것처럼 아주 단맛이 나면서 화려한 꽃향기가 펑하고 터져서 이럴 수가 있나? 이거 너무 훌륭하다. 하면서 감탄했는데 그 이후로는 쭉 그런 꽃향기는 느끼지 못해서 뭐가 문제일지 몇 번을 마시며 고민했었다. 어느 날 양치하고 조금 지나서 이 차를 마시는데 또 꽃향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원인은 치약에 있었고 여러분 유시몰하세요, 오리지날 투스페이스트. 아쉽게도 루피시아에서 자랑하는 놀라운 꽃향까진 아니었고 은은하게 난향이 퍼지고 시원 달달한 맛이 강했다.

2포째는 20초 우리는 게 추천이었는데 아마 재탕 때가 가장 진하게 추출될 때라 침출시기마다 시간 분배를 그렇게 해서 최대한 균일하게 맛을 뽑아내려고 이렇게 안내하는 듯했다. 아무튼 재탕은 20초로 충분했고 첫 탕 보다 더 진하게 반복되는 느낌을 받았다. 은은함보다는 시원하고 상쾌하고 개운한 느낌이다.

3, 4포째는 각각 1분, 2분으로 우렸는데 이제 자스민같은 은은한 꽃향은 더 남아있지 않았고 맛도 덖음차 특유의 구수함과 단맛이 느껴졌다. 내포성은 나쁘지 않은 편으로 5포까진 거뜬하고 6포까지도 나름대로 유지가 되는 편이나 뭔가 호지차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못해도 중작의 느낌

이렇게 가볍고 산들산들하면서 살짝의 난향과 단맛과 감칠맛이 나는 녹차가 있었나 생각해 보다가 마침 옆에 있던 우전이 눈에 띄어 내친김에 비교시음을 해봤다. 동일한 조건으로 우전을 마시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나 고카세 쪽이 맛도 향도 연한 상태에서 단맛과 감칠맛만 조금 더 튀어 오르게 벨런스가 맞춰졌다는 것이다. 하동의 녹차가 강단 있고 카리스마 있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어쩌면 한국의 덖음 녹차와 일본의 가마이리차는 기원도 지향점도 너무도 다른 비교불가의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세인 센차 사이에서 살아남아 이제 서서히 빛을 보고 있는 고카세를 마시면서 일본 녹차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지, 왜냐하면 지난 시즌 이건 정말 너무하다고 까고 또 깠던 루피시아 벳삥상의 베이스인 후카무시 센차처럼 수렴성 없이 진하지만 부드럽고 감칠맛이 강한 차를 점점 원하는 일본인들의 입맛에 부응하는 방법으로 덖음 녹차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고 센차에 비해 발전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한국에서도 다양한 방법의 제다법이 연구되고 상품화되어 한국 녹차의 다양성을 올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에 계신 차 연구원 분들 화이팅입니다. 끗.

근데 다음번 차도 일본 덖음 녹차인데 이렇게 끝내도 되는 건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