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은 출근없이 집에서 쉬고있다. 첫날은 에어컨을 차갑게 틀어놓고 음식점들이 배달을 시작할 때 까지 늦잠을 잤다. 배터지게 우동을 먹고 느릿느릿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오후나절이 다 지났다. 저녁이 되기 전에 서둘러 이불장을 정리했고 빨래를 하나 더 돌렸다. 입사일에 들고갈 서류를 챙기고 나니 새벽같이 나간 아내가 아홉시가 넘어 들어왔다. 늦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이 들었다.

마무리할 일이 많아 또 새벽같이 아내가 출근하고 난 뒤 뭔가 재밌는게 없을까 새로 나온 재미있는 게임이 있나 뒤져보았으나 뭘 봐도 시큰둥하다. 게으름. 언제부터 이렇게 게을러진 걸까. 게임을 하는 것도 상당히 품이 드는 일이다. 그 조차도 귀찮아진 것이다. 게임을 하고 노는것도 귀찮아지다니 얼마나 게을러 진 걸까. 그러는 사이에 경력증명서 스캔본이 도착했다. 주소에 오타가 있었고 수정을 요청했고 오타 부분에 수정 및 날인을 해서 새로 보냈길래 미안하지만 새걸로 다시 뽑아달라고 요청했고 법적으론 문제 없을텐데 꼭 새걸 뽑아야겠냐는 전화를 받았고 너같으면 새로 입사하는 회사에 이런거 내고 싶겠냐고 나중에 어떻게 될 줄 알고 이걸 받냐고 했고 나와 원수진 부장이 자기도 껄끄러워 그런다며 알겠다 다시 뽑아주겠다 하더니 금방 새로 뽑아서 전달해줬다. 이 과정에서도 그냥 둘까 싶은 마음이 몇번이나 들었지만 더는 게으르고 싶지 않아 실행에 나섰다. 아니, 오늘의 게으름이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게 싫어서 그랬다. 아내가 부탁한 일을 잠깐 해주고 나니 점심이었고 주문한 냉면은 맛이 너무 없었지만 꾸역꾸역 먹었으며 갑자기 장이 꼬이는 느낌이 들어서 끙끙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또 오후가 지나갔다.

백수의 시간은 빨리 간다. 그래서 더 바쁘다. 멈춰있던 시간이 갑자기 흐르기 시작하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지금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을 생각한다. 사춘기 이후로 감정 밑바닥에 우울함이 깔려있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깊은 바닥에 깔려있는 우울함이지만 그렇다고 뭐 그리 진하진 않은, 가볍고 투명한 우울. 쇼팽의 녹턴을 들었고 그 뒤엔 짐노페디를 들었으며 클로드 볼링과 드뷔시로 옮겨다녔던 20대 초반의 씁쓸함 같은 그런게 뱃속 어딘가에서 꿈틀거려 불편하다. 틴에이저때의 나이브함과 20대의 감성과 30대의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게으른 마흔살이 되어버렸다. 다들 어디로 가버린걸까. 토이 노래중에 이적이 부른 그런 노래가 있었던 것 같다. 나만 홀로 여기 남겨진건지 떠나온건지 이제 곁에는 가장 최근에 만난 아내만이 남아있다. 어딘가 단절되고 분리되어버린 기분이다.

최근 글을 남기면 매번 하는 이야기 같은데 글을 좀 더 자주 남겨야겠다. 여길 리뉴얼할 정도로 바쁜 백수시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여길 놓쳐선 안될 것 같다. 이곳이 뜸해진 최근 몇년이 가장 단절되고 파편화된 시간이었다. 분명 어제도 며칠 전에도 쓰고싶은 것이 있었는데 머뭇거리고 고민하다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게으름이 번지면서 생각도 휘발성이 강해졌다. 입사하고 9월 부터는 저녁마다 읽고 쓰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겠다.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아무튼 내 루틴은 지키면서 살던 꼴깝러가 나의 본질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