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헤라자드의 다채로운 매력에 빠지면 답도 없다 정말
시즌2를 시작하면서 첫 차로 아라비안 나이트를 마셨었다. 이번엔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꾼, 나레이터인 세헤라자드를 마셔보도록 한다. 세헤라자드는 왕비의 불륜을 목격하고 돌아버린 왕이 나라의 모든 처녀들을 불러들여 하룻밤 자고 죽이고 하룻밤 자고 죽이고 하룻밤 자고 죽이고 나라에 처녀가 씨가 마를 무렵 미친 왕을 막아보겠다고 용감하게 나선 고위관료의 딸로 무려 천일동안 재미난 이야기들을 연재하면서 나 죽이면 다음 편 없음, 듣기 싫음 죽이던가를 통해 서바이벌에 성공, 이후 왕의 마음을 돌려서 다시금 착한 왕이 되게 했다는 전설의 그 레전드 프린세스다. 민트가향 녹차로 괜찮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던 터라 아라비안 나이트와 깔맞춤 하기 위해 보부상님께 부탁드렸다. 아라비안 나이트와 마찬가지로 여름한정이고 50g 봉입에 800엔. 상미 1년.
아라비아 스타이루 노 민트그린느티 니 사와야카 나 구레이프후루츠 노 카오리 오 노세 마시타.
아라비아 스타일의 민트그린티에 상큼한 그레이프후룻 향을 더했슴다.
왜 이걸 먼저 읽어보지 않았나… 잠시 뒤에 나는 그것을 아주아주 후회하게 된다. 녹차 종류에 늘 적혀있던 레시피가 그대로 적혀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걸 잃게 된 걸까? 시음기를 적는 지금에서야 후회후회.
녹차보다 우롱차가 조금 더 많아 보이고 큼직하게 마른 낙엽처럼 페퍼민트가 시선을 강탈한다. 레몬필과 콘플라워가 화사함을 더한다. 스피아민트도 들어갔다고 하고 녹차 산지가 스리랑카와 일본이니까 그럼 저 우롱차는 어디서??? 모르겠다. 암튼 바싹 마른 민트와 차 냄새가 제법 기분을 설레게 한다. 우려 봤다.
80도로 식힌 물로 5g, 300ml, 1.5분 우렸다. 팟에 따라내고 우림팟의 뚜껑을 열어보니 엽저에서 고무줄 삶은 냄새가 난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강하고 호불호가 갈릴 냄새인데 나쁘게 말하면 고무줄 삶은 냄새이고 좋게… 도저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개인적으론 막 싫지는 않아서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모든 향이 아주 강하다. 입안에 들어오는 스피아민트의 향이 아주 강한데 맛도 꽤 있어서 베이스인 우롱차가 맵쌀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와우. 자데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
(출처: 지붕뚫고 하이킥)
일교차가 큰 요즘, 아침저녁 선선할 때 이렇게 마신 핫티가 아주 괜찮았다. 활력이 확 돈 달까. 베이스티의 맛이나 향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진 못하기 때문에 재탕에서도 첫 번째 팟과 거의 동일한 민트가 베이스로 느껴질 정도의 차가 나온다. 같은 온도의 물로 시간만 20초쯤 늘렸다. 마실수록 강단 있는 기품이 느껴진다. 민트의 향이 브리티쉬 쿨러에 비해 직설적이고 상쾌하다. 한 김 식혀 숙성하니 우롱차 베이스의 삽미가 존재감 있게 다가온다. 이때 식힌 한 김이 반의반의반김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고 나는 또 후회하게 된다.
급랭으로 아이스티를 해본다. 80도에서 5g, 150ml, 1.5분 한 뒤 얼음을 가득 부어준다. 아까 맡았던 고무 냄새가 너무 심해서 도통 뭔 맛인지 모르겠다. 재탕을 마셔봐도 그렇고, 다시 우려 봐도 그랬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싶어서 아까 끓이고 남은 식어버린 물을 대충 부어서 1.5분 우린 뒤에 어딘가에 던져두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느낌으로 책상에 올려놨다가 그대로 잊어버렸는데 한 30분 뒤에 생각이 나서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한입 마셔보고 버리자는 생각이 들어 얼음컵에 다시 따라서 마셔봤다. 맙소사. 고무줄 너 시트러스 탄내였구나. 몰려오는 시트러스. 지금 뭐 자몽주스세요? 뒤늦게 찾아보니 자몽가향차…였니? 제가 공주님을 너무 뜨거운 물에 말 그대로 담가버렸군요. 미지근한 물에 정성껏 씻겨드렸어야 하는데 아주 온천수에 데쳐버렸으니.
부랴부랴 냉장고에 가서 7시간 된 냉침을 마셔본다. 6g, 450ml. 앗, 이미 늦었나. 아까 그 80도 핫티의 차가운 버전이다. 민트향이 치약급이다. 한번 알고 나니 이제야 마지막 끝무렵에 시큼한 자몽향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이거 낭패다. 반 이상을 마셔버렸는데. 다시 한번 부랴부랴 핫티부터 재시도해본다.
70도에서도 한 김 살짝 날린 67도 언저리에서 5g, 300ml, 1.5분 우려 보면 수색은 아까보다도 더 노랗게 연하고 당장이라도 원샷이 가능할 정도로 딱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어있다. 좀 순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민트 위주의 향이네 이번에도 망했나 생각하며 두 번째 잔을 따라서 마시는 순간 자몽의 향긋함이 민트의 벽을 넘어 달려 나온다. 연하디 연한 우롱베이스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도 신기하다. 우리고 나서도 반드시 한 김 식혀서 마실 것. 이것이 포인트였나보다. 자몽향으로 시작해서 민트의 상쾌함과 우롱베이스가 동시에 느껴진 뒤 산미와 자몽향과 수렴성이 사악 따뜻한 바람처럼 불어오는 맛이 압권이다. 아니 이런 차를 왜 우리는 온도를 똑같이 열탕이라고 적어놨냐고 멍청이들아. 같은 온도의 재탕은 오히려 더 좋은데 적당히 빠져나간 민트덕에 자몽이 좀 더 진하게 느껴지고 이제야 몸이 풀렸는지 우롱베이스가 한껏 근육질이다. 자몽의 쏘는듯한 새콤한 향이 민트향과 이렇게나 비슷하게 어울릴 줄은 몰랐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공주님.
실패했던 급랭도 다시 해본다. 65도에서 5g, 150ml, 1.5분하고 얼음 가득. 앗. 뜸 들이는 걸 깜빡했더니 또 예전의 그 맛이다. 과일 후숙하듯 천천히 다시 뜸 들이고 얼음을 부어주면 자몽의 새콤함과 민트의 상쾌함이 청량감 있게 마셔진다. 온도가 낮다 보니 녹는 물이 적어서 좀 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좀 더 진했으면 싶은 느낌이다. 찻잎을 좀 더 넉넉히 넣고 다시 해보고 싶은데 이미 다 마셔버렸다. 안돼에에에에에에.
아쉽게도 제대로 우리기가 아주 까다로운 아이스티로 모르고 대충 마셨으면 오히려 충분히 만족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나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고 잠깐 뜸 들여서 마시라는 내용은 어디에서도 안내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뭔가 정말정말 잘못우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나는 왜 버젓이 자몽가향이라고 써있는데 그걸 보지 못한 걸까. 왜긴 일본어를 못 읽으니까. 어쨌든 추천하기엔 조금 곤란한 차가 되어버렸지만 내년에 꼭 다시 만나보고 싶은 여름한정 세헤라자드. 아라비아의 진한 민트향이 새콤 달달한 뜨거운 자몽의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듯한 오묘함은 쉽사리 잊기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매력의 차가 이름마저 세헤라자드라니. 빈 봉지를 바라보는데 여운이 많이 남는다. 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