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064. 실론 루후나 OP

올해는 나도 계획이란 게 있었다. 그 계획에 따르면 닐기리와 실론을 각 4종씩 루피시아에서 사 와서 무더운 여름이 지나기 전에 다 마시고 시음기를 작성했어야 한다. 하지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와 유난히도 더웠던 올해 여름은 나에게 크나큰 슬럼프를 안겨주었고 너무 힘든 나머지 시음기 작성이 일처럼 느껴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차를 마시는 행복을 무조건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에 차를 다 마시고도 시음기가 없는 경우도 많아졌다. 장황하게 말했으나 이번에도 거의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시음기란 이야기. 그래도 한 번 마실 분량을 남겨두긴 했으니 마지막 확인은 가능할 듯하다. 다른 실론 친구들과 함께 사 왔고 50g 봉입에 800엔으로 합리적인 가격대이며 상미기한은 제조일로부터 2년.

세일론 루후나

루후나는 캔디와 함께 로우그로운의 대명사로 지대가 그리 높지 않다 보니 덩달아 인기도 그냥 그렇다. 나도 자주 사 먹진 않았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만난다.

세이론 난부 루후나 나라데와 노 아츠미 노 아루 아지와이 토 코코치 요이 우마미, 죠-시츠 나 노미구치 노 코-챠 데스.
실론 남부 루후나만의 두툼한 맛과 기분 좋은 감칠맛, 고급스러운 목 넘김의 홍차입니다.

루후나하면 레몬티나 아이스티보단 부들부들한 밀크티가 생각나기 마련인데 설명에 나와있는 루후나만의 두툼한 맛이 아무래도 묵직한 느낌에 가까워서 그런 것 같다. 물론 스트레이트로도 아주 훌륭하지만.

우리고 난 뒤 나물이 기대되는 찻잎

봉투를 열면 의외로 김가루 꼬소한 향이 올라온다. 의외라고 생각되는 부분인데 아무래도 루후나를 너무 가볍게 여긴 게 아닌가 싶다. 수확시기가 꽤 어린잎을 땄을까? 약간은 세작에서 날법한 고소함에 가깝다. 건엽을 덜어내면 진짜 가늘고 길게 말린 홍차잎들이 나온다. 가지도 꽤 들어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차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유념도 세게 하지 않았는지 손으로 살살 펴도 찻잎을 다 펼 수 있을 것 같다.

보기보다 순한 루후나

6g의 홍차를 300ml, 100도의 물로 2.5분 우렸다. 피오니잔에 담으니 깔끔한 홍차향이 기분 좋게 퍼져간다. 향에서 무겁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스트레이트로 딱 좋은 정도의 무게감이다. 한 모금 마셔보니 건엽에서 느껴졌던 꼬순내가 아주 순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우러나있다. 녹차였다면 혀에서 바로 느껴졌을 약간의 단맛과 그보다 진한 감칠맛이 입안을 지나간 뒤 몇 번의 잔향을 거쳐 느껴진다. 회감에 가깝게 입안을 맴돌아 느껴지는 맛이다. 물론 특유의 빳빳한 향이 스모키 한 뉘앙스로 올라오고 몇 잔 마시고 나면 혀에 살짝 수렴성이 얹혀진다. 생각도 못한 단맛과 감칠맛에 이건 앞으로도 스트레이트로 결정되었다. 그래도 곁들이는 다식은 버터쿠키라던지 유지방이 많은 편이 잘 어울렸다. 밀크티에 잘 어울리는 차들이 그렇지만 차의 맛이 버터맛등에 밀리지 않을 때의 짜릿함이 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관악과 현악이 서로 밀리지 않고 주고받아야만 들리는 디테일이 살아나는 것처럼.

가지가 꽤 섞여있었네

루후나는 로우그로운이고 무겁고 밀크티용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대부분의 루후나가 마지막 잔은 우유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루후나는 달랐다. 마실수록 단맛과 감칠맛이 느껴졌던 아마도 처음인 루후나. 높으신 고지대 하이그로운의 맛과는 다른 강하고 확실하면서도 수려한 맛을 보니 마치 실론계의 아이돌 같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내공이 상당했던 실론 루후나 OP, 끗.


차 마시는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