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촌년이 다 됐구나. 시골-정확하게는 도시 근교일 뿐이지만-에서의 버스 배차시간은 참으로 가혹했다. 이미 점심나절도 한참 지난 시각. 덩그러니 홀로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던 아라는 치를 떨었다. 한겨울 발가벗겨진 채 밖에 내버려진 기분이었다. 이 촌구석으로 쫒겨난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젠 슬슬 약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걸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이 입 밖으로 나갔으리라. 처음 보는 남녀는 성큼성큼 걸어 정류장 안으로 들어왔다. 은수를 마지막으로 얼마 만에 마주친 처음 보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여자는 여기 버스는 언제 오는 건데에? 하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입을 뾰죽 내미는 것이 보통 여우가 아닌 듯 했다. 남자는 어 글쎄 하더니 아라쪽을 흘끔 보았다. 혹시라도 말을 걸까 싶어 얼른 못 본 체를 하는 아라에게 기어코 남자가 물었다.

-여기 버스 언제 오는지 혹시 아세요?

마침내 버스를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날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라는 상황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꾸역꾸역 금방… 하고 말을 흐렸다. 금방 올 것 같아요. 아라가 하려고 했던 말이었다. 남자는 짧게 아, 네. 하고는 다시 함께 있던 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라는 남자의 수다스러움에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남자보다도 옆에 있는 여자가 계속 맞장구를 쳐주는 게 문제였다. 가령, “근데에, 뭐 엄청 대단하다더니 저 오빠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하고 다시 입을 뾰죽거린 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꽤나 신경이 거슬리는 입술이었다. 확 잘라버리고 싶어. 남녀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아라는 점점 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마치 바다 속으로 한없이 끌려들어가는 풍선 같았다. 쪼글쪼글 구겨진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의 풍선. 깊은 바다로 들어가면 풍선이 터져버리려나 하는 궁금증조차도 터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바뀌어 슬픈 기분이 들었다. 꼬로록 꼬로록… 바닷속이라 생각하니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 고요해져서 좋기는 했다. 보헤미안 랩소디-퀸이야 아라도 좋아하니까-를 하는데 혼자 노래하고 지휘까지 해가면서 대단치도 않았다는 둥, 그 와중에 피아노까지 동시에 쳐대는 괴물 같은 녀석이라는 둥. 남자가 신이 나서 떠드는 바람에 평화로운 바닷속은 그리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입을 확 막았으면 좋겠어. 나직이 혼잣말을 하려던 아라는 너무 오래 입을 다물고 있어서였나, 목소리는 나오질 않고 입술만 움찔움찔 움직이고 말았다.

-뭐, 아무튼 저거 대단한 놈인데 왜 저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청춘환자지 뭐.

남자가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아라는 간신히 크게 숨을 한번 쉬고는 결국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망할 놈의 버스정류장.

정말 성가시다. 동균이 다녀간 뒤로 은수는 내내 개운치 못한 마음이었다. 개운치 못한 마음위로 성가시다는 말만 맴돈다. 한때는 죽고 못 살던 친구였던 동균. 은수는 눈을 감고 이마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탓인지 속이 다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잔건지 모르게 자고 일어나니 창밖이 어두웠다. 초저녁도 못되어 침대위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일어나보니 이미 새벽이었다. 은수는 휘적휘적 방 밖으로 나와 거실 불을 켰다. 저쪽 식탁위엔 찻잔과 티 포트가 그대로 널려있었다.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입안에 또 한 번 쓴맛이 돌았다. 마음이 마구 요동을 치면서 미처 가시지 않았던 잠이 기분나쁘게 걷혀가고 있었다. 성가시다. 이런 마음의 동요가 너무 성가셨다. 어제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성가시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그제서야 몸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은수는 쓴 입맛을 다시며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괘씸한 것들. 동균은 은수가 아직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하던 시절의 친구였다. 그는 기타를 쳤었다. 어제 동균이 앉았던 옆자리에 놓인 찻잔이 끈적하게 입술자국을 남긴 채 식탁에 놓여있었다. 개 새끼. 목소리만 나왔더라면 분명 그렇게 욕을 했을 터이다. 시원하게 욕을 하지 못하니 머릿속에 욕이 또 한 번 맴돈다. 개 새끼. 어제 녀석은 “잘 지내냐.”하며 마치 병문안온 사람처럼 문을 열고 들어왔었다. 그 뒤로 처음 보는 여자가 따라 들어올 때부터 은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었다. 물론 나중엔 은수 대신 건반을 치고 있는 아이라고 동균이 소개를 하긴 했지만. 동균은 그렇게 여자를 끼고 와서는 여 보란 듯 자기 노래가 담겼다는 씨디를 놓고 가버렸다. 은수에겐 도발이상의 잔인함이었다. 거기에 녹음되어있어야 할 목소리는 은수의 것이어야 했다. 사실 녹음 제안을 받은 것은 은수가 팀에서 노래를 부르던 때였다. 차라리 보이지나 말지. 그냥 계속 잊고 살게 찾지나 말지. 뜨거운 물에 손을 넣어 그릇을 닦기 시작하며 은수는 입안에 고이는 시큼한 물을 삼켰다.

*본 소설은 2009년 2월 부터 팀블로그 퀸테센스(http://teamhere.tistory.com)에 연재하였던 동명의 소설을 수정한것 입니다. 연재소설로 발표되지만 본래는 단편소설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