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8900. 만다린 오리엔탈 도쿄 블랜드

도쿄에 가면 꼭 해봐야지 싶었던 여러 가지 중에 으뜸은 티룸 투어였으나 가고 싶었던 세월이 길었던 만큼 모아 온 정보들이 워낙 오래전 정보들이라 없어진 티룸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좀 흥이 나질 않아 메이저 한 브랜드 위주로 몇 군데만 다녀오게 되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거의 매일 티룸을 가긴 했으니 일정의 타이트함이 가장 큰 문제였을 거다. 역시나 너무 오래 기다린 세월에 비해 일주일은 짧았을지도. 만다린 오리엔탈의 티룸은 오랫동안 리스트에 있었는데 이미 여행 다니면서 방문한 분위기 비슷한 티룸들이 많아 제외를 했었다. 그런데 잊고 있었던 게 바로 루피시아의 콜라보 상품. 애초에 이것 때문에 알게 된 만다린 오리엔탈인데. 너무 오래전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한참 뒤에야 루피시아의 홈페이지에서 만다린 오리엔탈의 이름을 다시 보았다. 콜라보 상품이지만 드디어 온라인에서도 판매를 한다고. 우오오! 가 아니라 들러서 사 올 생각을 왜 못했지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옛날에 봤던 것과는 모양도 달라졌고 종류도 줄어든 느낌이지만 아무튼 이번 장바구니에 챙겨 넣었다. 드디어 만나보는구나. 50g 캔입으로만 나오고 2052엔으로 회원할인도 적용되지 않는 특별 상품이다. 게다가 상미기한은 반년. 갑자기 장국영이 마지막 묵었던 만다린 오리엔탈이 떠오른다. 이왕이면 유통기한이 만년이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이 대사는 금성무가 했던 대사이고, 아시나요 금성무는 일본사람이라구요.

깔-끔

틴 디자인이 옛날에 봤던 디자인이 아니긴 한데 깔끔해서 마음에 들긴 한다. 깨알같이 만다린 오리엔탈 로고도 들어있고. 개인적인 취향은 일러스트보단 타이포그래피 쪽이지 않나 싶다. 캔 주변에 음각 없이 민무늬인 것도 차이가 있다. 여러모로 콜라보 제품이라 특색이 잘 느껴진다. 캔 안에 들어있는 봉투도 코팅종이 소재로 일반적인 루피시아 제품은 아니다. 앞쪽엔 어떤 설명도 없이 제목만 있고 뒷면에 제품 판매정보와 함께 제품 설명이 적혀있다.

츄고쿠 푸캰쇼우산 노 우롱챠 니 칸키츠 노 카오리 오 쿠와에타, 하나야카나 카오리 토 슷키리토 시타 아토아지가 코코치요이 오챠 데스. 스트레이트, 미즈다시 아이스티 데 오메시아가리 쿠다사이.
중국 푸젠성에서 생산된 우롱차에 감귤 향을 더한, 화려한 향기와 깔끔한 뒷맛이 기분 좋은 차입니다. 스트레이트 또는 찬물로 우린 아이스티로 즐기실 수 있습니다.

복건성 우롱차라고 하면 워낙에 종류가 많은데 안계 철관음부터 무이암차까지 워낙 넓고 다양하게 나와서 짐작이 어렵다. 아무튼 감귤이라고는 하나 사전정보로는 베르가못 가향의 우롱차라고 했으니 친숙한 느낌이긴 하겠다. 시트러스 우롱차 또 마시게 되네. 레시피 자체는 루피시아의 흔한 우롱차 레시피인데 눈에 띄는 건 딱 냉침하라고 나와있는 점. 역시 냉침을 해봐야겠다. 홈페이지에서도 아이스티 라벨이 딱 박혀있으니 찻잎이 좀 아까워도 팍팍 넣고 냉침해 봐야지.

아니 이 차는?!

봉투를 열자마자 느껴지는 건 진한 주스 같은 과육의 향이었다. 이 과육 뭐더라. 분명 리치의 향이다. 아니 리치우롱에서도 안 나던 향이 왜 여기서 나요. 은은하고 달달한 꽉 짜낸 주스 같은 리치향이 몰캉 터져 나오더니 그 뒤로 약간의 휘발성과 함께 베르가못의 쎄한 향이 난다. 멀리서 찬찬히 향을 맡아보니 지금까지 맡아본 어떤 베르가못 보다도 우아한 베르가못이다. 리치향 달달한 베르가못이라니. 감동스런 마음으로 건엽을 덜어내 보면 검푸른 우롱차가 나오는데 철관음은 아니지만 민남계열의 느낌이 나는 우롱차가 들어있다. 포동포동 잘 생긴 느낌이다.

퀸 아망과 함께 하는 시간

3g 이상의 찻잎을 90ml쯤 되는 한 김 식힌 물로 30초가량 우려낸다. 시종일관 은은한 단향이 돈다. 베르가못이 호불호가 있는 게 향수를 들이키는 것 같아 싫다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리치향도 향수 느낌으론 그에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차는 정말 은은한 리치과육의 단맛만 향으로 전환한 듯 한 향이 돈다. 찻물에 코를 가까이 대보니 멀리서 우롱차의 농향도 느껴진다. 한 모금 마셔보면 단아한 베르가못의 향이 얇은 선으로 이어지고 리치과육의 향이 수채화처럼 투명하고도 선 굵게 퍼져나간다. 이 차가 생각보다 꽤 달달하구나. 우롱차의 베이스가 느껴지지 않는 건가 했는데 차의 단맛과 감칠맛이 꽤나 짙다. 농향에서 느껴지는 구운향도 가향의 열대과일향과 시트러스감을 훨씬 고급지게 만들어준다. 베르가못이 목 뒤로 넘어가서 비강으로 치고 올라가는 속도가 꽤 빨라서 이 모든 디테일이 숨바꼭질하듯 감춰지는 게 아쉽다. 오히려 디테일을 모른 채 고급스럽다는 인상을 먼저 받는 것이 의도일까. 베르가못 자체도 굉장히 독특한 뉘앙스인데 팔각 느낌의 매콤한 향이 있는 베르가못이다. 어딘가 알싸한 향이라고 생각했던 게 이런 이유인 듯. 처음 정보를 받았을 때 생각했던 감귤, 베르가못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만다린 오리엔탈이라는 이름에 딱 맞는 느낌이다.

냉침을 안 마셔볼 수 없다. 5g 정도의 차를 300ml 넘는 물에 넣고 냉장고에 4시간 넣어두었다. 찻물에서 나는 향이 리치과육보단 먹고 난 껍질에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달달하다. 아이스티의 서늘한 기운까지 같이 느껴져 더더욱 차가운 리치 같다. 한 모금 마시면 비로소 진한 베르가못향이 올라온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어 진하게 우렸다면 향수같이 난폭하게 입안을 휘저었을 향이다. 하지만 적당한 양에서는 은은한 베르가못이 입안 가득 달달한 맛과 함께 옛날 부드러운 밀감의 뭉근한 감귤 느낌을 준다. 약간은 홍시 비슷한 뭉근함이다. 냉침으로 강하게 우러난 베이스 우롱차의 달달한 맛과 약간의 감칠맛이 그런 과일의 인상을 강화해 준다. 더 좋은 점은 냉침을 두 번까지는 거뜬히 뽑아먹을 수 있다는 점. 절대로 비싸서 두 번 마시면서 정신승리하는 게 아니고 내포성이 그 정도는 충분히 된다.

꼬깃꼬깃 우롱차

베르가못 우롱차라고 해서 뻔한 느낌이겠구나 생각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우아함과 기품이 있었다. 정말 드레스업 하고 격식을 갖춘 찻자리가 떠오르는 맛. 따듯하게든 차갑게든 입안에서 후운이 오래오래 지속되는 부분도 그런 고급스러움을 완성시키는 요소였다. 셔츠와 원피스와 햇살 가득한 티룸의 이미지가 입안에 끝없이 이어지는 잔향과 함께 계속해서 떠오르는 고급스러운 블랜드. 이례적으로 통신판매를 개시할만한 차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정식 라인업으로 올리기엔 상품 개발 시에 발생한 여러 사정이 겹쳐서 콜라보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겠지. 콜라보 상품은 구하기도 어렵지만 언제 또 단종이 될지 몰라 불안한 게 더 크다. 부디 이 차는 계속해서 생산 유지를 해줬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이 차의 유통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해주길 바라면서 만다린 오리엔탈 도쿄 블랜드,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