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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는 불 꺼진 거실에 누워 커다란 거실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문은 방충망만 쳐둔 채로 활짝 열어두었다. 이렇게 불을 끄고 누워 창밖을 바라보면 하늘가득 별이 보이고 풀벌레들과 바람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다 보면 그래도 이런 낙이 남아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다행이다. 은수는 다행 이라고, 정말 다행 이라고 속으로 말했다.

누워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물론 머릿속으로 떠올릴 뿐이지만- 시간은 참 잘도 지나간다. 그 녀석들과 연습을 하며 밤을 새우던 때도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갔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 집안의 공기가 점점 그림자로 물드는 것 같았다. 한 낮 동안 숨 막히게 죄여오던 감정들도 하나하나 바닥에 늘러 붙은 느낌이었다. 계속 누워있다간 자신까지 바닥에 늘러 붙어 버릴까 겁이나, 은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월세를 내는 작은집은 어디 하나 어둠에 녹아내린 것 없이 멀쩡했다. 큰방에 꽉 들어찬 피아노-그나마 이 집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일 것이다.-도 멀쩡히 어둠속에 서있었다. 언젠가 잃을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도 없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나 은수는 피식 웃었다. 틀렸다.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참 생각도 못한 것들 마저 참도 잘 빼앗아간다.

-새로 건반 맡아줄 애야.

동균이 여자를 소개하던 모습이 자꾸 생각난다. 어제 낮 부터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동균의 씨디를 주워와 틀던 은수는 새삼 기가 차 코웃음을 쳤다. 아니, 치려했지만 기운이 빠져 크게 숨을 내쉰 꼴이 되고 말았다. 은수의 숨소리가 거실 바닥으로 깔렸다. 이내 그 위로 스피커에서 나온 음울한 노래가 끈적하게 덮였다. 은수는 소파에 앉아 양 무릎을 가슴팍으로 모아 안았다. 악다구니 한번쯤은 해볼 것을. 바닥에 깔린 동균의 목소리를 보며 모든 것을 잃은 사람마냥 은수는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잠깐 걸었을 뿐인데도 은수의 등엔 땀이 흘렀다. 동네 구멍가게를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올라가는 길엔 코스모스도 한둘 피어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은수의 뒷덜미를 잡아끄는 듯 했지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실은 딱히 멀리 나갈 생각으로 집을 나선 것도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고 일어나니 집안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터벅터벅 구멍가게까지 라면을 사러 나온 것뿐이었다. 그랬던게 오랜만에 햇볕을 쬐어서인지 식욕보다도 바람이 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문득, 서울을 한번 가볼까 싶어져 여기까지 걸어 나온 것이다.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불어 등에 흘렀던 땀이 서늘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시외버스는 아직 출발하기 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갈아탄 은수는 집에 두고 온 mp3가 아쉬웠다.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은수는 아라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집에 먹을 것이 없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아라 때문이었다. 지난번 집안을 홀랑 뒤져서 다 먹지도 못할 정도로 잔뜩 음식을 만들어 놓고 가버린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야 은수는 며칠째 아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퍼뜩 기억해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라는 늘 그런 식이었다. 며칠간 보이지도 않고 전화도 꺼져 있다가-문자를 보내도 소식이 없어 전화를 걸어보면 전원이 꺼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쳐들어와 집을 홀랑 뒤집어엎으면서 있지도 않은 빨래며 청소를 하고 저번처럼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죄다 꺼내어 음식을 만들어놓고 간다. 조울증이라는 것을 만화에서나 보았지 이렇게 가까이서 보리라곤, 아니, 자신의 일상에 하나의 변수로 다가오리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은수였다. 버스가 출발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으며 은수는 생각했다. 허긴, 이렇게 머릿속에서 말이 뱅글뱅글 맴도는 데도 입 밖으론 나오지는 않는 지금 상황도 드라마에서나 봤지 언제 내 일이라고 생각해 봤던가. 은수의 한숨에 버스 창문이 잠깐 잠시 흐려졌다.

*본 소설은 2009년 2월 부터 팀블로그 퀸테센스(http://teamhere.tistory.com)에 연재하였던 동명의 소설을 수정한것 입니다. 연재소설로 발표되지만 본래는 단편소설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