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의 눈엔 너무도 따뜻하게 보이는 은수였다. 양손을 머리위로 들어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그 긴 손가락이 마침내 머리모양이 마음에 들었는지 가슴팍께로 내려와 양 손목에 콜론을 슥슥 바른다. 거울 앞에 서있는 은수의 동작 하나하나가 숨이 막힐 정도로 섬세해 아라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정하다. 비쩍 마른 저 등짝까지. 활짝 열린 세면실문 사이로 비껴 보이는 은수의 모습은 따뜻하다 못해 몸이 사르르 녹아내려서 소파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을 정도였다.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건 아라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렴 어때. 소파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아라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아득한 기분에 눈을 감아버렸다. 언제부터일까. 매번 은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렇게 되어버린다. 아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매번의 첫 번째는 언제였지?

은수의 뒷모습을 보기까지의 과정은 늘 정해져있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이 지나면 주말이 오는 것처럼. 아라가 샤워를 하고 나오면 으레 은수는 큰방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그러다 물기가 다 마른 아라가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하면 그제야 은수도 조용히 옷을 입기 시작한다. 외출복을 챙겨 입고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이나 이것저것을 하는 은수. 매번 이 장면이 반복될 때 마다 아라는 어째서인지 다정하단 느낌이 들었다. 의미를 떠나서 그 어감이, 다정하다는 어감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간다. 적어도 아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부터일까. 아라는 다만 첫 번째 주말이 언제인지를 기억 못할 뿐이었다. 아라는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더듬어 보다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라는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은수네 집과 아라네 집은 고작 5분 거리였다. 천천히 걸어도, 빨리 걸어도 도착하는 시간이 비슷하리만치 가까운 두 집. 언젠가는 몇 걸음인지 꼭 세어봐야지. 아라는 마음먹고 있었다. 이런 시골길을 잠깐 걷는 것뿐인데. 아라는 인적도 없는 이런 시골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나서기 위해 그렇게나 공을 들여 외출준비를 하는 은수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구질구질한 것 보다는 나으니까. 그것이 아라가 은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굳이 거기에 대해서 토를 달지도 않은 이유였다. 한눈에 보아도 부잣집 도련님같이 생긴 은수가 늘어난 츄리닝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닌다는 것도 막상 상상해보려면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게다가 오로지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이렇게나 준비해준다고 생각하면. 아라는 새삼스레 기분이 벅차올라 고개를 돌려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은수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빤히 은수의 얼굴을 보고 걷다가 그만 돌부리에 발이 채이고 말았다. 걸음이 꼬인 아라를 은수는 잽싸게 붙들어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은수가 집까지 배웅해주는 이 시간을 더욱 좋아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가끔은 너무 행복한 나머지 노을 진 이 길이 붉은색이 아닌 핑크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라가 대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은수는 그 앞에서 기다려 주고 있었다. 여러모로 보아 배웅이라기 보다는 명백한 에스코트였지만 아라는 늘 이것을 배웅으로 치는 것이 좋았다. 대문을 닫고 문틈으로 은수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 모습이 과연 배웅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그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뒷모습조차도 갑자기 새삼스러워 아라는 문틈에서 화들짝 얼굴을 물렸다. 언제부터일까? 이런 익숙한 장면들이 오늘따라 새삼스러워 아라는 몹시 당황스러워 졌다.

이미 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라는 뒤척이고 있었다. 은수를 언제부터 이렇게… 의식도 못하고 있던 사이에 어느덧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게다. 이 정도면 아라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인데 말이다. 일상이 되어버린 남자라. 저녁나절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모든 것들의, 이 새삼스러운 모든 것들이 익숙해지기 직전의 상황까지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아라였다.

안녕.

아라네 집 앞을 지나가는 은수에게 건넨 인사가 마치 유치원생 꼬맹이 같았다. 자기 또래처럼 보인다는 이유 하나면 처음 보는 아이에게도 밝고 씩씩하게 안녕 외쳐 부르는 꼬맹이.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라 본인도 조금은 당황스러웠었다. 흠칫 놀라 아라를 향해 돌아본 은수의 낯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하지만 은수는 금새 미소를 짓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휑하니 자리를 비켜 지나갔었다. 그땐 확실히 무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아라는 몹시도 약이 올랐었다. 그런 기억은 있는데, 그 이후로 한동안 은수에 대한 기억이 이어지질 않는다. 한참의 공백 끝에 은수의 집에서 거울 앞에 선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익숙한 장면만이 떠오를 뿐이다. 이미 처음이 아닌 익숙해진 기억으로.

그 기억 사이의 공백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텐데. 그 공백 무렵을 생각하면 아라는 그저 한없이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몸이 움츠러든다. 아라는 다시 무릎을 모아 앉아 얼굴을 묻었다.

이럴 때 은수가 옆에 있었더라면. 은수가 주방에서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사무쳤다. 이렇게 무릎을 모아 앉아있으면 은수는 말없이 차를 내어오곤 했다. 참을 수 없이 은수가 보고 싶어져 아라는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받아도 은수는 언제나 말이 없다.

-나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아라는 한참을 기다렸다 말을 잇는다.

-우리 오늘 약 안 먹었다.

그러게. 수화기에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라는 그러게 라고 대답하는 은수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아라도 은수도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약이 있다. 그러게. 이번엔 아라가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걸 왜 잊었을까. 그 새삼스러운 일상 중엔 같이 약을 나눠 먹는 것도 포함되어있는데 말이다.

-잘 자.

아라는 이리로 와줘 라고 마음을 한껏 담아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은수가 이런 마음을 알아차릴 것이라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화를 내려놓으며 아라는 눈을 감았다. 지금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려던 은수의 표정 대신 풍경이 떠올랐다. 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핑크빛 노을이었다. 은수네 집 대문 앞에 그 노을이 산산이 부서지는 예쁜 풍경. 끔찍한 기분을 느낄 때면 아이러니 하게도 이 풍경이 늘 떠오르곤 한다. 기분과는 상관도 없는 아름다운 풍경. 숨쉬기조차 힘들게 무거운 공기가 아라를 눌러왔다. 여지없이 아라는 무릎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이내 그 자세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본 소설은 2009년 2월 부터 팀블로그 퀸테센스(http://teamhere.tistory.com)에 연재하였던 동명의 소설을 수정한것 입니다. 연재소설로 발표되지만 본래는 단편소설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