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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는 참 알 수 없는 여자라고,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야 있지만 역시 이렇게 나란히 침대위에 뻗어있을 때면 은수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격하게 서로의 몸을 부비다가 나가 떨어지고 나면 옆에 누워있는 이 여자가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정체모를 여자와 몸을 섞은 기분이 들어 은수는 화들짝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은수가 일어나자마자 아라도 곧장 따라 일어난다. 은수가 샤워를 하는 동안 아라는 가만히 침대에 남아있는 법이 없다. 등장에서 퇴장까지 도대체가 정신이 없는 여자다. 오늘 오후에도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등장해서는 집안 여기저기를 들쑤시는 통에 한참동안 정신이 없었다. 요 며칠 안 보인다고 걱정을 했던 게 무색하도록. 연애란 뜬금없는 행동들이 만들어간다는 말도 들어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누구인지도 모르겠는 저 여자와 연애라니. 은수는 복잡한 기분에 괜히 샴푸를 하던 머리를 벅벅벅 문질렀다.

처음엔 이렇게 될 생각까진 없었다. 아라와 처음 자던 날에도 이렇게 오래 관계를 지속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날도 아라는 은수네 집에 와있었다. 집까지 따라 들어오는 아라를 딱히 말릴 방법도 없어 그냥 두었더니 자기 집 마냥 들락날락 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날 아라가 갑작스럽게 입을 맞추더니 키스를 해왔다. 마시던 물을-아마도 약을 먹고 있을 때였나 그랬을 것이다.다 흘려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야말로 저돌적인 키스를 일방적으로 당했었다. 키스만 당했던 건 아니었었지. 자존심이 상해 거꾸로 은수가 키스를 하고 있을 때 불쑥 바지가 벗겨지더니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진행이었다. 서툴렀지만 적극적이었던 그 여자가 오늘도 이 집안에 있다.

물기를 툭툭 털고 나오는데 아라가 샤워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은수는 수건을 걸친 채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언제부터인가 샤워소리를 들으며 피아노를 치면 마음이 편하다. 아라가 나오면 한 번 더 뒹굴 요량으로 옷은 입지 않았지만 그걸 떠나서 벌거벗은 몸으로 샤워소리를 들으며 피아노를 치는 게 좋았다. 소리와 독대하는 느낌이랄까. 은수가 이렇게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아라는 어느 샌가 수건을 두르고 나와 조용히 옆에 앉아 있곤 했다. 처음엔 피아노 치다가 일어나는데 밑에 뭐가 있어서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조용해진다. 피아노를 쳐주면. 신기한 일이었다. 사실상 아라가 이 집에 들어와 유일하게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기도 했다. 이 조용한 반응이 은수는 늘 만족스러웠다. 이럴 때의 아라는 블랙홀처럼 고요하다. 강하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반응. 가끔은 아라와 침대위에서 뒹구는 시간보다도 이 순간이 더 편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쇼팽을 한참 치다가 건너편 소파에 나와 앉아있는 아라를 발견한 지금도, 이미 그녀를 한 번 더 올라타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 뒤였다.

종이위에 멈춰있던 샤프가 딱 소리를 내며 심을 부러뜨리고는 주저앉았다. 한참을 빈 종이만 멍하니 쳐다보고 앉아있던 은수는 몸을 일으켰다. 싱크대로 향하는 발걸음이 피곤했다. 운동 부족인가. 속으로 말하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피아노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으러 가고 있을 때였나 어느 샌가 뒤에서 아라가 달라붙었다. 평소 같으면 계속 소파에 앉아있었을 아라인데. 등에 느껴지는 아라의 몸이 차가워 감기라도 걸릴까 다시 이불속으로 들이 밀었었다. 결국 어젯밤엔 샤워를 한 번 더 했어야 했다. 술병이라도 난 것 같은 몸을 움직여 주전자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주전자에 물이 도로록 떨어졌다. 높은음에서 시작하여 일정한 중음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재미있어 몇 번이고 주전자를 비웠다가 다시 물을 받았다. 따라락으로 시작해서 오오오로 끝나는 노래. 언젠간 그런 노래를 만들어야지 생각하며 탁자위에 남겨진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화창한 가을, 거실 안으로 청명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종이위에 하얗게 부서지고 튀어 오르는 빛이 아름답기도 하고 한편으론 가슴이 먹먹해져 주전자에 받아놓은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싱크대 안에 그대로 내려놓인 주전자가 찰랑 소리를 냈다.

한 번에 강의 두 개를 틀어놓을 수 있는 점이야말로 인터넷 학원 수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아라는 믿고 있었다. 강의 세 개를 틀어본 적도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겹쳐서 포기했었다. 한 번에 틀어둔 강의들은 얼추 비슷한 시간에 끝이 났다. 아라는 난 참 효율적이야.라고 마음 속 깊숙이 자랑스러움을 느끼고는 기지개를 폈다. 지금만 해도 4시간 걸릴 수업을 2시간 만에 다 마쳤다. 수업불능이라니. 아라가 학교를 그만둘 때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었다. 수업불능입니다. 한참 병원을 자주 다닐 때의 일이었다. 학교에 아라편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학교 사람들이 멍청한 거지. 입을 한번 삐죽 내밀고는 현관으로 나가 운동화를 신었다. 현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으며 바닥에 발끝을 탁탁 튀기면 그대로 준비 완료였다. 오늘은 동네 전체를 두 바퀴 돌아야지 마음을 먹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운동회 날씨!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를 보곤 기분 좋아 크게 소리를 쳤다. 작은 마당을 지나 며칠 전부터 어딘가 녹이 슬었는지 끼이익 소리를 내는 대문을 닫고는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동네를 세 바퀴나 돌았다. 집까지는 못가고 은수네 집으로 들어와 버렸으니 정확하게 세 바퀴는 아니지만. 아라는 은수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못하고 발만 현관에 둔 채 방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은수가 나와서 힐끔 내다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라는 은수를 따라 곧장 일어나려고 했지만 현기증이 일어 다시 누웠다. 어지러운 게 좀 가라앉자마자 저쪽에서 은수가 약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투명한 은수의 약. 그 예쁘게 생긴 은수의 약이 은수의 기다란 손위에서 입으로 슉 떨어지는걸 처음 보았을 때 아라는 질투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은수에게 키스를 하며 입안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 이후로 아라는 종종 자신의 약을 가져와 입안에 숨긴 채 은수와 키스를 하곤 했다. 은수의 입안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왜인지 그렇게 약을 먹으면 약이 녹아도 쓴맛이 나지 않아 좋았다. 아라가 겨우 몸을 일으켜 거실의 소파위에 털썩 주저앉았을 땐 은수는 이미 약을 다 먹은 뒤였다. 이런 그로기 상태에서 바라만 보는 은수도 아라는 꽤나 괜찮아 보였다.

*본 소설은 2009년 2월 부터 팀블로그 퀸테센스(http://teamhere.tistory.com)에 연재하였던 동명의 소설을 수정한것 입니다. 연재소설로 발표되지만 본래는 단편소설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