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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모습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두운 조명, 사람들, 그리고 뭐라 정의하기 힘든 지하실의 냄새. 은수는 바 건너편에 서있는 아저씨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스툴위에 걸터앉았다. 예전 같은 장난스러운 표정대신 입술위에 손가락을 하나 올려보이면서. 그냥, 조용히 구경만 하다가 나갈 심산이었다. 눈치 빠른 주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병맥주를 하나 따서 건네주었다. 차가운 맥주를 받아들고도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수는 빙그르르 발로 스툴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저곳, 무대근처의 저 자리가 은수의 자리었던 때가 있었다. 은수는 물끄러미 그곳을 바라보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짠해져 다시 바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게 다 무슨 짓이야. 천천히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생각했다. 조심스레 주인이 다가와 잘 지내냐고 물었고 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냅킨만 바라본 채.

하나둘 아는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까지도 은수는 구석자리에서 조용히 맥주 한 병을 비우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아는 얼굴들을 피할 순 있었지만 저쪽에서 아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땐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한때 내가 있었던 자리에서 들리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 그것도 제일 친했던 친구의 목소리가 은수의 귀를 파고들었다. 눈앞이 점점 시커매지면서 묘하게 현실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데. 은수는 말 그대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여전히 안절부절인 은수의 등을 툭툭 치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여어, 은수 오랜만이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얼굴은 많이 익은 사람이었다. 당황스러운 맘에 더더욱 허둥대는 은수를 보며 그 사람이 말했다.

-잘 지내? 왜 그래?

등 뒤를 돌아보던 은수의 팔에 무언가가 걸리는 듯 하더니 팍 하는 소리가 바닥에 울렸다. 옆자리에 세워져있던 병을 떨어뜨린 것이다. 순간 은수는 주변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 같았다. 은수는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그 와중에도 어젯밤 거실에서 들었던 것마냥 생생하게 들려오는 동규의 끈적한 목소리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괜찮아?

병 깨지는 소리에 다가온 주인아저씨가 걱정 된다는 듯 은수에게 물었다. 다행히 아무도 은수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말을 걸었던 그 사람도 주인을 보며 어깨를 으쓱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후였다. 하지만 은수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균이 자신을 본 것만 같아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은수는 결국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주인아저씨의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지만 은수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단숨에 건물 밖까지 뛰어나왔다. 한줄기 땀이 목뒤로 흘러내렸다.

은수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거리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에 휩쓸려 무겁게 걸음을 옮기는 은수의 옆으로 바람이 휙 지나갔다. 집을 나설 때완 달리 바람이 차가웠다. 집에 가고 싶다. 머릿속엔 달랑 그 생각 하나뿐이었는데 마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은수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갈까요?

생각 없이 택시에 올라탄 탓에 집주소를 적어서 준비하지도 못했다. 이미 택시기사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은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손님, 어디 가냐구요? 하고 다시 묻고 있었다. 은수는 그저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택시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라는 소파 팔걸이 밑에 고개를 파묻었다. 웅크리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채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9시었다. 요 며칠 몸이 좋지 않았었다. 그건 순전히 차가운 방바닥에서 잠이 들었기 때문이야라고 간단히 결론을 내리버렸다. 아라는 그 자세 그대로 몸을 뒤로 눕혔다. 한순간에 몸이 뒤로 뒹굴 구르면서 반대편 팔걸이에 머리를 부딪혔다. 엉덩이부터 시작해서 하체가 소파 밑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엉덩방아를 쿵 찢고 나서야 아라는 고양이가 된듯한 나른함에 기분이 좋아 흐흐흐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우당탕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람이 휑하고 불어 들어와 바닥에 널려져있던 종이들이 다 날렸다. 너무 갑작스레 들이친 바람에 한순간 박자를 놓친 아라는 조금 뒤늦게서야 으악 하고 뒤로 물러났다. 청소를 해야겠다. 갑작스러운 결정을 내린 아라는 양팔을 걷어붙이고 방여기 저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침나절 한참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집안이 은근히 쌀쌀했다. 청소는 시작한지 세 시간 만에 겨우겨우 끝이 났다. 아라는 팔짱을 끼고 어깨를 움츠린 채 주방으로 달아나다 시피 움직였다. 뭐라도 따뜻한걸 마시자고 가스를 켜던 아라는 문득 은수 생각이 났다. 누구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 통화 중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은수가 주는 차를 마시면 눈앞이 몽롱해져.

 수화기 건너편에선 그게 무슨 소리야? 라고 했던 것도 같다. 확실히 아라는 차 맛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마시고 있으면 이불속처럼 나른해지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라는 켰던 가스를 그대로 다시 끄고는 그길로 현관문을 나섰다. 도착하는 대로 밥을 해먹자. 은수네 집을 향하며 그렇게 마음먹는 아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본 소설은 2009년 2월 부터 팀블로그 퀸테센스(http://teamhere.tistory.com)에 연재하였던 동명의 소설을 수정한것 입니다. 연재소설로 발표되지만 본래는 단편소설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