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혹은 지리멸렬하게 중얼거린 일곱 개의 조각조각




0. 우연하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한다.
일부러 외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괜찮다는 평을 듣고 나서도 선택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퍽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귀띔해준 게 주효했던 것일까.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내가 실제로 맞부딪치는 일상이 소설이나 영화처럼 멋지지도, 인과적이지도 않음을 알고 있는데, 굳이 허구에서 그 현실을 또다시 맛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말이다. 아무튼…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처음 조우하게 된다고 하면 너무 뒤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이 영화를 권해준 것에 우연히, 아무 생각없이 반응해서 보기 시작했다.

1. 삶은 연속적이거나 개연적이지 않다.

글쎄, 삶의 퍽퍽함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영화, 라고 하면 될까. 끝없이 지리멸렬하게 펼쳐지는 일상의 파편들이 버겁게 숨통을 내리눌러 몇 번이고 영화를 끊었다가 다시 보기를 되풀이했다. 물론 일곱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아무런 환상도, 허구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겪어보지 않았거나 못했지만, 분명히 그 조각조각들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고, 영화는 심술궂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삶이라는 건 말이지, 절대로 연속적이거나 개연적이지 않아. 그건 파편으로 제시되는 것이고 우연으로 점철되는 거야. 그 속에서 너희는 지리멸렬하게 숨쉬고 손발을 흔들어대는 거지.

영화 볼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잠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비록 일상이 그러할지라도, 그리고 그 일상을 재현한 허구가 그렇다고 우겼어도, 그것을 바라보고 다시 나의 언어로 재구성할 때는 연속적이면서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 끄적거림을 이어나가야 한다, 고 나는 중얼거린다. 그러나… 이미 글러버린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숨통을 조이고 답답하게 했던 그 무거움은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장악해버린 것 같다.

한쪽 구석으로 몰리고 쫓기는 연극배우는 안 풀리는 일상 속에서 잠시 탈출을 꿈꾼다. 누군가의 노래에서 달콤하게 흘러나왔던 ‘춘천’이라는 곳으로 떠나지만, 그곳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하긴… 지상 어느 곳이 숨통을 뚫리게 할 수 있을까 말이다. 그곳이 춘천이나 경주, 혹은 제주, 홍콩, 캘리포니아면 뭐 다를까 싶지만, 결국은 거기가 거기인 셈이다. 쓴 입맛을 삼키면서 웃을 수 밖에… 다른 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도 역시 한심한 내 모습은 여전하고, 관계는 꼴리거나 얽히고, 술이나 마시고 여자랑 자는 일은 변하지 않는다. 삶은 이렇게도 지리멸렬하고 무한대로 반복되는 루프, 인 것이다.

2. 나는 너에게 전화하지만, 그것은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경수가 춘천으로 가게 된 것은 성우의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리저리 꼬여버린 경수가 술 취한 성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답하지만, 그것은 반사작용에 가깝다고 봐야 할까. 전화, 라는 도구는 ‘지금’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느낌을 ‘너’에게 전하기 위한 것인데, 경수와 인물들간의 전화 통화는 차라리 소통의 단절 쪽이 어울린다. 명숙과의 통화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대충 상대방의 목소리에 시큰둥하게 대답하거나 대답 자체를 회피하는 경수의 모습에서 소통은 이미 물 건너갔으며, 그것은 관계의 단절까지도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없거나 거짓에 가깝다. 아니면 나의 언어는 고유하지 않으며 지겨운 반복에 불과하다.

괴물은 되지 말자, 고 영화감독이 이야기한다. 그 말을 들은 경수는 춘천의 성우에게 그대로 전해준다. 하룻밤 불장난처럼 명숙과 자고 난 뒤, 그를 잡기 위해 성우를 이용하는 명숙에게도 그 말을 던져준다. 그러나 그 말은 다시 경수에게 돌아온다. 쫀쫀하리만치 출연료를 챙기는 경수에게 그 말을 던진 감독의 말은 분명히 울림이 있게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경수의 입술을 통해 반복재생될 때 처음의 느낌과 감동을 잃어버린다.

나는 내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내 언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과 구분되어 고유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생활의 발견>의 인물들은 자신의 고유함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분명히 입술을 열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루한 입놀림에 그치고 만다. 어느 누구도 고유한 말하기, 혹은 살아가기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에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 부분에서 가슴이 퍽퍽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중얼거리고 그 말에 반응을 보여 웃거나 또다른 말을 중얼거리지만, 결국 그것은 서로가 소통하거나 진실에 직면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흔적에 그치기 때문이다.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일정한 수순대로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잠을 자기 위해서 몇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제일 인상깊었던 대사는 “우리, 이제부터 거짓말하지 말아요.” 라는 명숙의 말이었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로 둘러대면서 핵심을 피하던 그녀와 경수, 다른 말에는 지리멸렬한 거짓과 의미없음이 담겨 있었을지라도 그 말에는 그들의 ‘진실’이 담겨져 있다. 우리, 이제부터 욕망에는 충실해요.

4. 날 사랑해요? 차라리 나랑 한번 더 하고 싶다고 말해요.

당신은 사랑한다는 말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믿는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 경수의 영화를 보고 반했다는 명숙이 그를 도발해 관계를 가지면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가 춘천을 떠날 때 향수와 자신의 사진을 건네어주면서 거기에 ‘사랑’을 부여한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어쩌면 감각의 충족을 착각하는 게 아닐까. 경수가 ‘잘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일까.

그녀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룻밤 소모품으로 던져버린 경수는 어떠한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반하게 된, 그러나 이미 알고 있었던 선영을 좇아가 결국은 관계를 맺고 하는 말이 무엇인가. 사랑한다고 자신없게 중얼거리는 경수를 보면서 또 무엇이 사랑, 이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두 여자 모두를 만족시켜주는 경수에게 과연 사랑이란 감정은 실재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에게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 물론… 사랑은 육체적인 부분도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 세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오히려 ‘한번 더’라고 바꿔 말해주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내게 가슴 설레이는 일이나 감동은 없다. 무엇인가 남아 있다면 오르가즘에 불과할 것이다.

5. 뫼비우스의 띠, 혹은 우로보로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모든 것은 일장춘몽으로 끝난다.

서울-춘천-경주로 이어지는 경수의 여행은 제자리걸음처럼 보인다. 아까도 말했듯이 장소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그의 여정은 거기가 거기처럼 보이는 것 같다. 서울에서부터 내린 비는 춘천과 경주에서도 똑같이 내려서 그의 깝깝한 일상을 똑똑히 느끼게 해주고, 이곳 저곳에서 마주친 사람들도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 느낌에 빠지게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선영과의 대화에서 표현되듯이 불륜의 관계에 빠진 선영도 예전에는 순수한 나이로 춘천을 여행하던 대학생이었고, 운동권과 사랑에 빠진 무용강사같은 집착적인 여자였다. 경수 또한 자신에게 매달리는 명숙을 애써 떼어놓으면서도 선영에게 집착하고, 언젠가는 자신의 아내를 배반하고 춘천의 호반에서 다른 여자와 오리배를 탈 수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명숙과 선영은 두 사람이면서 한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자나 자신이 매달리는 여자, 그 둘과의 관계를 갖지만 경수는 어느 여자도 자기 옆에 붙들어 두지 못한다. 선영과 우연히 들어간 점집에서 점 보는 여인은 그에게 스님의 사주이며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선영의 남편의 사주가 좋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선영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경수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를 맞으면서 성우가 이야기한 청풍사 회전문의 뱀을 떠올린다. 허탈하게 웃으며 그곳을 떠나는 경수, 그는 잠시 허망한 꿈을 꾼 것이다. 일상의 퍽퍽함을 지우려 탈출했지만, 그것은 또다른 일상의 연장이었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부단하게 도망가려는 손오공처럼 부질없는 시도를 하고 만 것이다. 그가 돌아갈 곳은 한없이 꼬이고 안 풀리는 재미없는 생활이리라.

0. 꿈을 꿀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것이 지독한 악몽의 무한루프가 아니라면.

유치찬란한 연두색 화면에 신문기사 제목처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의미의 제목들이 나타날 때, 그냥 영화 보기를 포기했어야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이 짧은 끄적거림을 붙들고 있는 내내, 가슴 속은 알 수 없는 헛헛함과 혼돈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두 시간이 조금 못 되는 영화를 끊었다가 다시 보았고, 파편 같은 끄적거림 역시 막막함으로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지웠으며 다시 두들기는 일을 되풀이했다.

영화 속의 경수나 명숙, 혹은 선영처럼 만나거나 행동하지 않을지라도 나의 일상 역시 그들의 것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이상 꿈꿀 수 없는 나이, 혹은 생활, 그러나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나의 일상은 울면서 넘겨야 하는 식은 고봉밥이나 짠 맛을 잃은 소금처럼 너덜거리고 있다. 주변에서 꿈이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잘 살고 있냐고 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눈알만 굴리고 있거나 애매하게 답을 흐릴 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꿈꾸지 않는다.

의사소통의 단절, 그리고 관계의 이지러짐, 새삼스럽게 대두된 정체성 문제, 덧붙여서 늙어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도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 이 한심하고 한심한 인생을 바라보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해야 하는데도, 그것조차 귀찮고 버거워서 잠정적으로 유보시켜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답답하고 퍽퍽한 영화라니.

사람에 대해서, 혹은 삶에 대해 무엇인가를 꿈꾸고 바랄 수 있던 그때, 나는 감히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금은… 거의 꿈꾸지 못한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꿈꾸지 않길 바란다. 꿈꾸는 자는 행복할 수 있지만, 그 꿈 속에는 지난한 일상의 반복을 견딜 만한 용기와 지구력, 아니면 그 일상을 모험과 환희로 변화시킬 힘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영화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지랄맞은 무한루프의 악몽이 두려운 까닭에 꿈꾸지 않으련다. 이것이 <생활의 발견>을 보면서 이끌어낸 나의 허접한 발견,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