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삶의 이야기…


1.

머잖아 잊혀질 것이다.

거센 바람조차 고요히 머물다 가던 푸른 나무가지에도

잎은 시들고 꽃은 질 것이다.

기쁘게 노래하던 새들도 무심히 제갈길을 찾아 떠나갈 것이다…

어제는 밤새도록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간혹 핏기 잃은 달빛이 잠시 나의 창에 머물다 가기도 하였지만, 이미 나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아 차렸고, 그저 낯익은 불빛아래 잠시 몸을 뒤척거리다 잠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을 바라볼 때 조차도, 내게 늘 사랑은 뼈아픈 어긋남 이었으므로 치욕이었음으로 제아무리 그리워한들 갈망해본들 그저 날은 가고 세월은 스스로 흘러만 갈 뿐이라며 냉소했다.

거친 바람이 내 앙상한 뼈속을 할퀴고 지나 가면

차마 견딜수 없게 된 나는 매일밤 술을 마시며 헛소리를 떠들어 댔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고 이미 그렇게 미쳐 버린 세월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더러는 아무 고통도 없이 날이 새는 것을 두려워했고, 간신히 깨어나는 아침이면 기껏 이리저리 제멋대로 나뒹구는 빈 술병속에 남겨진 내 지난밤의 육신의 흔적들을 찾아내곤 안도했다…

2.

그리하여 나는 매일밤 꿈을 꾼다. 잃어 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꿈…

세상의 그 어떤 작은 몸짓, 눈짓으로도 슬퍼하거나 기뻐할 줄 알며, 작은 울림에도 귀기울이며 대화 나눌 수 있었던… 언제나 그렇게 푸르고 싱싱한 청춘으로, 눈빛으로 우리 다시 만나는 꿈.

이미 퇴색했던 모든 것들이 온전히 자신의 빛깔을 드러내고,

멀리 떠나 지쳐버린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와 벅찬 눈물과 웃음으로 서로를 부둥켜 안는다.

가슴 아프다…

이미 영영 사라지고 지나가 버린 것들이 이제야 비로소 서로의 부끄러운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어루만져 주리니. 그래 이젠 기억해.

길을 잃지마. 울지마.

우리가 되돌아 오는 이 길이 비록 꿈이었다 해도,

식은땀 흘리며 깨어나야만 하는 가위눌린 헛된 꿈이었다 해도…

3.

어쩌다 잠깨인 새볔녁…날마다 마신 술로 언제나 몸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한참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밤새 저 홀로 악을 쓰던 음악소리 가까스로 멈추어 섰다.

어디서인가 멀리 길을 잃고 떠도는 자들의 낮은 헛기침 소리 간간이 들려왔다 사라지고 나면

나는 언젠가 내가 무심히 꺾어 버린 수많은 풀잎과 꽃들을 기억한다.

그 말라 비틀어진 풀잎과 꽃들도 어디에서 꿈을 꾸고 있는지…

우리들 들뜬 사랑으로 날을 지새우던 숱한 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도 그토록 외로움에 떨며 쫒기는 꿈을 꾸고

저마다 홀로 힘겨운 새벽을 버텨내고 있었는지..

살면서 이렇게 홀로 남겨진다는 건 두려운 일이지만 세상은 그저 스스로 제 자리를 지키고 버텨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다.

바람이 부는대로 쓰러져서 잠든 이 밤에도 나는 여전히 꿈길속을

헛되이 헤메이며 너를 죽도록 사랑했고 죽도록 미워했다…

그래 우리 아직은 이세상 어딘가에서 더욱 멀리 흩어져

더욱 더 견고한 그리움으로 살아남기로 하자

슬픔을 더욱 완강한 슬픔으로 견뎌내기로 하자

이미 슬퍼할 수 없는 것을 슬퍼하고

이미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며…

그래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들만을 그리워 하지 말기로 하자.

…….

그리하여 머잖아 잊혀질 것이다.

잊혀지고 나서야 다시 만날 것이다.

지친 바람조차 머물 수 없엇던 앙상한 가지사이에도

푸른 새싹이 돋고 꽃은 피어날 것이다.

지나가던 낯선 새들도 기꺼이 노래 부를 것이다.

2002년 봄의… 모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