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캘리포니아행 티켓

#1_ 남자, 지울 수 없는 사랑과 배신의 기억으로 몸부림치다

그에게 그녀는 좋아하는 음악처럼, 스며드는 색감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비로소 남자는 생각한다.

<왜, 모두가 헤어질 때 ‘해피 투게더’인가? 행복해야 돼, 라는 말처럼 부질없는 인사말이 또 어디에 있다고….>

이별 이후, 그는 실연과 상처, 욕망 등에 관한 사례집이 되었다.

<넌 이미지와 철학의 조화 같아. 너의 사상과 너의 이미지는 일체화되어 있어.>

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면 여자는 그냥 웃기만 했었다. ^-^ 한때는 그들에게도 “보면볼수록빠져드는캐릭터야” 라고 남자가 속으로 중얼거릴 때, 여자의 머리에도 “바보 같은 그를 좋아함”이라는 문장이 박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한 시간 대개는 남자 쪽만이 이렇게 생각했다.

<저 여자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려온다. 그 매력에 홀딱 반하기란 그렇지 않은 상태보다 이천만 배 황홀하군.>

#2_ 장만옥이 부르는 자장가에 꿈을 꾸다. 홍콩의 밤거리에서

<정말로 그러길 바래? 사랑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고, 그래서 헤어지자고? 사랑하는 방식이 똑같아서 사귀는 연인이 어디 있니? 이 나이를 먹었어도 그걸 하나 몰라?>

헤어지자는 여자의 말을 듣고 처음에 남자는 화를 냈었다. 그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경삼림 왕비의 선글라스를 쓴 그녀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내가 갈구하던 스타일은 그런 거야.>

그것은 탁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 앞에서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젖은 눈빛, 천진한 슬픔이 화면보다 앵글보다, 매력적인 대사 앞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항상 “몽환적이고 찝찝스러운 요즘”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별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화양연화? 내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장 고통스러워서 오히려 아름다운 순간이 화양연화라면, 그건 바로 그녀와 함께 한 순간이었어.>

화양연화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남자는 왕가위의 영화에 탐닉하기 시작했고 이별의 아픔을 마취시켜갔다. 독특한 대사, 감각적 화면에 점점 빠져들며, 장만옥이 부르는 자장가와 함께 홍콩의 밤거리에서 잠들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3_ 간접적인 표현이 더 가까이 와 닿는다

<절제된 카메라 워킹을 좋아합니다.>

무심코 들어간 왕가위 클럽, ‘가위삼림.’ 첫 정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짤막했다.

<평균적 인간 in 가위삼림!>

<네?>

<님도 가위삼림의 평균적 인간이라고요.>

<맞아. 우리는 느낄 수 있죠? 그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운…>

갑자기 그녀 없이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그녀가 없는데도 무심하게 채팅을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게 느껴졌다. 왜 저들은 저렇게도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떠들어대는 걸까. “너와 함께 있었으면…” 아휘가 읊조리던 폭포 아래서의 독백처럼 그는 신음했다.

<묻지 마라, 날 다 던지며 살고 싶다!>

저도 모르게 자판 위에서 손을 놀렸나 보다.

<오홋. 무슨 말씀이시지?>

<아, 아닙니다. 갑자기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올라서… 님들 말씀 계속하세요.>

#4_ 보영이 있어서 더욱 외롭다

놀랍고도 아름다운 영상의 색감, 독특한 매력의 이별연습 장면 등등. 채팅을 하며 사람들은 왕가위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저마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첫사랑 관련 질문은 곤란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게 만든 그 영화를 도무지 내게서 떨어뜨릴 수 없어요.>

의미 없는 말들의 향연이다. 그 중에서 남자의 관심을 끄는 여자의 닉네임은 “아비정전~”

<좋은 장면이 너무 많잖아요!>

즐거운 듯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 보이진 않지만 분명 깔깔대고 있으리라. 아비정전하면 남자는 춤, 기억.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여자의 닉네임에서는 가벼움, 따뜻함, 낙관적, 무뚝뚝, 뜨거움 등이 연상된다. ‘~’표시가 주는 약간의 헐거움과 아비정전이라는 네 글자가 주는 이미지가 어우러진 탓이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그녀의 화법도 그랬다. <설명 못할 매력에 툭하면 보다가 “영상의 깊이, 완전 감동!”>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다가도 <미묘하게 어긋나는 사랑이 마음을 내리 눌렀어요>라고 조용히 말할 때도 있었다.

아휘의 외로움은 아휘가 혼자 있어서 깊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보영이 있기 때문에 아휘의 외로움은 짙어진다. 채팅 속의 그녀를 보며 남자가 떠올린 것이다. 그녀의 차분함은 활기참과 교차하는 속에서 더욱 가라앉아 보였다.

#5_ 게시판에 올라온 그녀의 글: 나의 주관적 생각을 이야기할 경우…(엄마 몰래 보세요)

아, 오랜만에 가위삼림에 글을 올리는 ‘아비정전~’입니다. 왕가위 영화들에 대한 느낌을 주관적으로 올려볼까 해요;;;

우선 중경삼림은 내겐 너무 매력적인 영화.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그의 냄새를 맡다가 다른 여자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울부짖는 페이. 새로운 시도, 충격 그 자체였어요.

그 다음 아비정전. 아비정전은 해피투게더와 연관지어져요. 장국영 때문일까요. “보영, 아휘를 안고 울다.” 해피투게더를 한 장면으로 요약하자면 저에겐 그래요. 그 탓인지 아비정전에서조차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외로움이 느껴지죠. 물론 매력적인 맘보춤에도 그냥 끌려요. 한때 설레게 한 이름, 슬프고 달콤한 느낌… “내 삶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라는 듯한 아비의 태도에 날 동일시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 닉넴도 아비정전~.

오늘은 여기까지만… 엄마 몰래 보세요, 는 조회수 올리려는 어설픈 시도. 끝!

#6_ 공허하게 울리던 공중전화가 마음을 울리다

남자, 부분적인 답변으로 전체를 왜곡할 수 있다는 듯 조심스런 그녀의 성격에 빨려 들어가 중독되어버리다. 비가 올지 해가 뜰지 몰라 선글라스와 레인코트를 동시에 착용한 임청하처럼 그녀도 어딘지 모르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참 지난 후 되돌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정말 왕가위를 좋아했을까? 비밀이 많아서 나무에 구멍을 내고 싶다던 그녀. 아름답기 때문에, 나는 본다고 했던 그.

<낯선 만남,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남자가 던진 첫 번째 질문. 기억되고 싶어 깨물어 주던 그때처럼… 그가 울리는 공허한 전화벨을 그녀는 들을 수 있을까?

<앞으로 뭐하고 살래?> 원초적인 질문을 회피하고 싶은 좀 이상한 넘에게 던져진 가장 막막한 질문.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앞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남자에겐 어떤 의미로 잠시나마 행운인 것이다.

#7_ What a difference day made

그들이 1대1 대화를 처음으로 나눈 하루. 그 하루가 조용하게 모든 것을 바꾼다.

<자기 인생에 간접적으로 접근하다. 사적인 질문에 공격 성향 출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뭐하는 거죠?>

<당신 이야기를 듣다 보니 파악되는 성격들이에요. 자기 인생에 간접적으로 접근하고 싶어하는 쿨함을 추구하지만 사적인 질문엔 날을 세우는군요. 그리고 헤어진 여친을 잊지 못하고 있고요.>

<헉, 여자가 그렇게 분석적인 거, 매력 없다고요.>

<매력을 꼭 찾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절름발이 사랑이지만 결코 비극적이지만은 않다는 게 제 모토입니다. 꺄아~ ^O^>

그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자꾸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그렇게 “나의 금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있을까?”란 상념이 그들의 머릿속을 맴돈다. 이윽고 찾아오는 완벽한 쓸쓸함! 그렇게 그와 그녀, 그냥 함께 우울해지다.

그 하루가 둘이 같은 공간에서 유덕화의 눈끝에 걸린 눈물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숨막히게 하는 영화,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눈빛들… 드디어 그녀가 먼저 물었다.

<훔. 으흐… 여자친구 있으세요?>

#8_ 깨닫지 못함과 깨달음, 그리고 정사씬

그날밤 그녀, 담요를 붙잡고 울다. 희망의 메타포, 그리고 슬픔과 그리움이 한데 섞여 어깨에 실린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고 다짐했던 그녀. 다음날엔 남자와 여자, 둘만의 커뮤니티가 사이버 공간에 만들어진다.

<가입 승인 질문(단답형)>

<답_사랑이란 감정이 두려워 우린 늘 떨어져 있었다.>

“마요네즈로 밥 비벼 먹기 싫어?” 엉뚱하게도 게시판의 첫 글은 이런 것. 그래, 그만큼 그들은 이제 희극적으로 슬픔을 배설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정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테크닉은 묻지마, 예술이다>

<횟수가 중요한가요? ㅡㅡ;>

남자와 여자 사이엔 이런 식의 친밀하고 외설적인 말도 오간다. 그리곤 결국, 여자는 전화로 긴 문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젠 이불을 껴안고 울었어요. “고독, 샤랄라, 두근두근, 정말 싫음!” 이런 느낌들이 후다닥 지나갔어요. 수많은 기쁜, 혹은 슬픈 일들과 함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뻑가는 눈빛이 생각나던 밤이었죠.>

남자는 소장과도 같은 말없음으로 대꾸한다. 그 의미를 아는 여자는 취생몽사가 필요한 이 과장처럼 남자와 가까이 했던 밤에 일어난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한다.

<몸무게는 묻지 마세요.>

그 앞에서 처음 옷을 벗으며 그녀가 했던 말이다. 서로의 몸무게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지울 수 없는 사랑과 배신의 기억이 순환한다. 다만 기억은 희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