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오늘도 샤워를 하고 나오자 큰방에서 은수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아라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소파위로 올라가 앉았다. 은수가 사용하는 수건들은 대부분이 커다란 타월들이어서 샤워를 하고나서 이렇게 걸치고 있으면 목욕가운같아 좋았다. 은수는 라비앙로즈를 치고 있었다. 아라에게 은수의 피아노는 병원의 환자복 같은 느낌이었다. 차갑고 무거운 새하얀 환자복. 신기하게도 환자복을 입고 있으면 아프지 않아도 굉장히 큰 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환자복 같은 은수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면 은수에게서 눈을 떼는 것도 입을 여는 것도 할 수 없게 기운이 쭉 빠져 버린다. 앙상한 젖은 몸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은수. 병원복처럼 차가운 라비앙로즈. 그런 은수가 피아노에서 손을 내리고 나서야 아라는 소파 앞 탁자에 있는 종이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비어있는 오선지가 손으로 대충 그린 듯 물결처럼 그려져 있었다. 앞에 음자리표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면 오선지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참 오선지를 보고 있을 때 은수가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옷을 챙겨입고 거울 앞에 서있을 차례일텐데. 뜻밖에 이어진 피아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류이치 사카모토의 레인이었다. 아라는 몸을 일으켜 피아노 옆까지 다가가 벽에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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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았다. 저렇게 마른 팔로 끊임없이 스타카토를 참 잘도 쳐댄다 생각하면서. 멜로디도 없이 반주만 계속 흘러나오는 레인. 반주만 계속해서 들리는 게 그로테스킹해 아라는 은수를 올려다보았다. 은수를 올려다 본 아라는 은수의 필사적인 표정에 깜짝 놀랐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은수는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급기야 그 숨소리는 헉헉거리는 소리로 변하더니 결국엔 새빨간 눈에서 눈물까지 주룩주룩 흘린다. 아라는 무언가 말을 해서라도 은수를 말리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당황해서 더욱 눈이 동그래질 뿐이었다. 그렇게 거친 숨을 내쉬며 피아노를 치던 은수의 숨이 조금씩 가라앉을 때였다. 헉헉거리던 은수의 숨소리에 작은 새소리 같은 것이 섞여 나왔다. 필사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던 아라의 귀에 점점 더 확실한 은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래였다. 은수는 노래를 하고 있었다. 이젠 소리가 트여 비명이 되어버린 은수의 목소리가 피아노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춘 바이올린. 그 비명소리가 아라에게도 너무 아팠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는 은수를 보며 아라는 정말이지 은수를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그만하란 말은 고사하고 가슴이 메어 숨도 쉬기조차 힘들었다. 소리 없이 은수를 바라보고 있던 아라의 눈에도 하염없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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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은수는 한참을 주방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은수의 옆으론 깨진 유리조각이 널려있었다. 오한이 와서인지 찻주전자를 떨어뜨려 깨뜨렸다. 피아노에 엎드린 채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것도 한기가 들어서였다. 일어나보니 피아노 옆에 아라가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었다. 모포를 꺼내와 아라에게 덮어주고는 차를 끓이러 왔다가 그만 찻주전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도자기로 된 포트는 바닥에 떨어지며 파삭 소리가 났었다.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며 깨져버린 파편들을 주울 기운도 없을 만큼 은수는 완전히 탈진 상태였다. 그대로 주방 바닥에 주저앉은 은수는 한참을 그렇게 웅크린 채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라가 다가오더니 주전자에 끓여둔 물을 컵에 따르고는 거기에 꿀을 타기 시작했다.

-꿀차.

은수에게 컵 하나를 내밀면서 아라가 말했다. 아라 역시 손에 컵을 하나 들고는 옆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 아라의 옆얼굴이 은수의 눈엔 부쩍 야위어 보였다. 내일. 하고는 한참 뜸을 들인 아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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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사러가자 저거.

꿀차를 후후 불어마시는 아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수는 다시 손에든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손으로 잡고 있던 머그잔이 뜨거워 손잡이 반대쪽에 대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아라는 이미 일어나 또 다시 집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겨우 동이 틀 무렵의 새벽이었다. 아라는 잠도 거의 없구나. 하고 다시 자려던 은수를 아라는 다짜고짜 침대에서 끌어내렸다. 아라의 다른 손에는 은수의 지갑이니 핸드폰이니 그런 것들이 들려있었다. 그렇게 은수가 끌려나온 곳은 침대 밖이 아니라 집 밖이었다. 자던 모습 그대로 손목을 붙들려 끌려나온 은수에게 아라는 다짜고짜 가자고 재촉했다. 어디를? 하는 표정으로 한참을 버티고 섰더니 그제서야

-사러 가야지. 티팟.

하면서 손목을 잡아 끌었다. 어쩌면 변한것은 없었다. 아라는 여전히 중구난방 앞뒤를 모를 여자 그대로였다. 둘은 천천히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걸었다. 내일부터라도 아침마다 서리가 내릴 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월이었다. 갑자기 아라가 폴짝폴짝 앞서가며 자기네 집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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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고 갈래?

딱히 배가 고픈 것도 부른 것도 아니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아라는 이미

-라면밖에 없는데…….

하며 반쯤 열린 대문 안으로 쏙 들어고 없었다. 은수는 아라가 서있던 자리의 아침풍경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음악을 하겠다고 낮밤 모르고 돌아다니던 시절에는 참 자주 보았던 해뜰녁의 풍경. 지금은 너무 오랜만인 아침노을이 옅은 안개위에 내리고 있었다. 순간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은수는 황급히 아라가 사라진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끼이익 하는 대문소리가 크게 들렸다.

*본 소설은 2009년 2월 부터 팀블로그 퀸테센스(http://teamhere.tistory.com)에 연재하였던 동명의 소설을 수정한것 입니다. 연재소설로 발표되지만 본래는 단편소설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