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개막작으로 왕가위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올것이 왔구나” 싶었다. 솔직한말로 그의 복귀작에 “왕의 귀환” 따위의 거창한 제목을 붙여 빠방하게 포스팅을 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째서인지 헐리우드에서 만든 작품임에도 미국 개봉은 한참 뒤로 잡혀있어서 나를 환장하게 만들더니 결국 어둠의 경로에서 떠도는걸 낚아다 보게 만들었다. 그래도 역시 영화는 극장이다.

개봉전인만큼 조심스레 적어보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스포일러 없이 조용히, 왕가위의 오래된 팬으로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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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부터 짧게 언급하자면 이 영화는 “왕가위의 헐리우드판 자기복제”라고 하겠다. 그만큼 왕감독의 전작들을 충실하게 반복하고 있다. 그중 가장 반복되고 있는 전작은 ‘중경삼림’이다. 문제는 전작들에서 보여졌던 꽉찬 밀도의 무언가가 빠진, 카피에 그친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그 원인을 촬영에서 찾고있는데 ‘크리스토퍼 도일’씨의 촬영이 화면 자체로 하나의 언어를 갖고 따라서 여유를 갖는 실제 대사와의 시너지를 통해 다체널로 언어를 구사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반면 ‘다리우스 콘지’씨의 촬영은 영상 자체로 하나의 언어를 갖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전작들의 스타일과 색감등 많은 부분에서 충실하게 ‘왕가위 스타일’을 살려내긴 했지만 왕가위 영화가 갖는 파워를 살려내지 못했다는 평을 내리고 싶다. 각본을 쓴 왕가위가 영어로 시나리오를 만들어야했던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이럴수록 영상언어가 더 받쳐줘야하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도일아저씨의 도움을 받았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비록 깊은맛은 좀 떨어졌지만 어쨌든 왕가위는 왕가위. 왕가위 영화라는걸 모르고 봤어도 “이 지독히 왕가위스러운 느낌은 뭐지?” 라고 물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왕가위를 두개의 키워드로 요약하곤 한다. ‘시간’과 ‘기억’이다. 하나의 키워드를 더 붙이라고 하면 ‘공간’을 붙이겠지만 어쨌든 그의 테마를 가장 잘 나타내는 두가지는 ‘시간’과 ‘기억’이다. 왕가위 감독이 직접 “이 영화는 거리(distance)영화이다”라고 밝혔듯 이 영화의 공간은 어떤 기준점을 두고 움직인다. 거리라는 단어는 기존의 시간이라는 테마와 치환되는데 전작들이 같은 공간이 시간을 두고 중첩되었다면 이번엔 다른 공간들이 거리를 두고 결국은 같은 모습으로 중첩되는걸 볼 수 있다. 또한 기억이라는 테마역시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데 기존의 왕가위 영화가 기억이라는 테마를 심도있게 다뤄 케릭터들에 무게감을 주었던것에 비해 역시 기억이라는 테마에서 좀 약한 모습을 보인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억이란 결국 개인적인것이고 그것이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야만한다. 영상언어이건 음성언어이건 어쨌든 이번 영화의 최대 약점은 언어였고 결국 기억이라는 테마가 약해지는 원인이 되었던것 같다. 평단에서 많이들 “카피에 불과하다” “가볍다”등으로 점수를 팍팍 깍는데 결국 이 부분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별점을 주라고 이야기한다면 4/5를 주고싶다. 기존의 왕가위 영화들에 4.5~5를 주었던것에 비하면 적은 점수이지만 여전히 safe. 새로운 왕가위의 팬들에게는 정말 가볍게 볼 수 있는 입문서가 될것 같아서이고 기존 팬들에게는 전작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를 주기 때문에 여전히 볼만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큰기대만 하지않고 간다면 아주 즐겁게 보고올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 스스로는 전작들을 떠올리는 수 많은 화면들과 올드팬을 향한 유머에 가까운 음악에 비실비실 웃으면서 봤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헐리우드 진출작이며 일종의 몸풀기에 가깝다고 본다. 아주 기초적인 왕가위를 헐리우드판으로 시험해보았으니 다음은 정말로 귀환을 해야할 차례이다.

왕의 귀환이라 하기엔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될것같다.